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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 Oct 15. 2024

에코의 메아리 그리고 담대함

담대함은 어디서 나오나.

존 워터하우스의 <에코와 나르시스(Echo and Narcissus,1903)>


강의 신 케피소스의 아들 나르시스(나르키소스)가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하여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그 모습을 뒤돌아 앉아서 고개만 돌린 채 애절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여인이 있다. 나르시스에게 외면당한 에코이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너무나 유명한 미소년 나르시스는 신화 속 아이돌이었다. 그는 용모가 매우 뛰어나 많은 선남선녀들이 그를 열망했다. 숲과 샘의 요정인 에코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비극은 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에코는 수다쟁이로 유명했다. 그녀는 이야기를 너무 좋아했다. 한 번 말을 시작하면 상대가 말할 새도 없이 떠들며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제우스의 아내 헤라와 마주쳤다. 헤라는 남편 제우스가 요정들과 노닥거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를 찾아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때마침 수다쟁이 에코를 만난 헤라는 그 현장을 물었고, 이에 신이 난 에코는 끝없는 수다로 헤라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그 사이 눈치를 챈 제우스는 잽싸게 도망가버렸다. 화가 난 헤라는 에코에게 저주를 내렸다. 남이 말하기 전에는 절대로 스스로 말할 수 없으며, 오로지 상대방의 마지막 말만 따라서하도록 했다.


이 일로 사랑 고백을 할 수 없게 된 에코는 애를 태웠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르시스를 몰래 따라다니는 일이 전부였다. 어느 날 나르시스는 함께 사냥 나온 동료들을 큰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우리 여기서 만나자"였다. 그 말을 들은 에코도 따라 했다. "우리 여기서 만나자". 그 말을 들은 나르시스는 동료들의 대답으로 생각하여 다시 한번 "우리 여기서 만나자"라고 소리쳤다. 그 말에 이성을 잃은 에코는 한 걸음에 달려와서 나르시스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당황한 나르시스는 "내 몸에 손대지 말고 저리 치워!"라며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고백은 "내 몸에 손대지 말고 저리 치워!"였다. 이 일로 크게 상처를 받은 에코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울기만 하다가 결국 그녀의 몸은 사라지고 산속의 메아리로만 남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된 영어 에코(echo)는 반사에 의해 반복되는 소리를 뜻한다. 우리말로 '메아리'라고 한다. 퍼져나가던 소리가 산이나 절벽 같은 데에 반사되어 울려 퍼지는 현상으로 산울림이라고도 한다. 한자어로는 반향(反響)이라고 한다. 반사되어(反) 되돌아오는 울림(響)이란 뜻이다. 하지만 원래 메아리를 뜻하는 글자는 따로 있었다. 그동안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詹                厃

이를 첨詹이 그것이다. 이 글자가 처음 등장하는 소전의 윗부분은 위태할 위다. 그 아래로 여덟 팔과 말씀 언이 있다. 위태할 위(厃)는 높은 언덕(厂) 위에 사람이 위태롭게 서 있는 모습을 그렸다. 높은 곳에 서 있는 모습에서 '우러러보다'라는 뜻도 나왔다. 그 아래 여덟 팔(八)과 말씀 언(言)은 말소리가 위로 뻗어 나가는 모양이다. "위험해" 혹은 "우리 여기서 만나자"라고 외치는 나르시스의 목소리가 언덕에 이르러 부딪치며 울려 퍼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그래서 어떤 장소나 시간에 '이르다'라는 뜻이 나왔다.


멜 담擔에서는 짐을 어깨에 메기 위해서 손으로 들어 올리는 모습이다. '섬'으로 읽으면 '빌리다'를 뜻한다. 메아리처럼 갔다가 되돌아오는 물건의 의미에서 '빌리다'라는 뜻이 나왔다.


은 '두꺼비'를 뜻한다. 이는 암컷에게 구애하는 수컷 두꺼비의 울움소리와 메아리의 유사성에서 비롯되었다. (직접 한 번 들어보길 바란다)


은 말 많은 에코의 '수다'를 뜻한다. 여러 사람들의 잡담과 그로 인한 웅성거림에서 '수다스럽다'와 '실없는 소리'를 뜻하는 헛소리 섬譫이 나왔다. 섬망譫妄이란 한자에 그 뜻이 담겼다. 섬망은 신체 질환이나, 약물, 술 등으로 인해 뇌의 전반적인 기능장애가 발생하는 증후군이다. 인지기능 저하로 횡설수설하며(譫), 지각이나 사고의 저하로 치매(妄)와 유사한 증상을 일으킨다.


그런가 하면, 첨은 '넉넉하다'라는 뜻도 있다. 이는 메아리詹가 생기는 크고 빈 공간의 넉넉함(廣)에서 나왔다. 이 때는 '담'으로 읽어야 한다. 맑을 담澹은 물이 넉넉한 호수나 늪을 말한다. '담박하다'라고 할 때의 담박(澹泊)은 염분이 없는 담수(詹)를 뜻하고, 암담(暗澹)과 참담(慘澹)에서는 깊은 수렁(詹)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조개 패(貝)가 들어간 넉넉할 섬贍은 재물이 '넉넉하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담대하다'라고 할 때의 쓸개 담膽에서도 담詹 '넉넉하다'는 뜻으로 쓰였다. 이는 한의학(漢醫學) 이론에서 기인한다. 중국 고대의 의서인 《황제내경소문()》에서는 담膽에 대해서 "결단이 여기에서 나온다(決斷出焉)"고 하였다. 옛사람들은 신체의 장기를 인체의 축소판으로 보았는데, 간(肝)은 생각을, 담詹은 결단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보았다. 여기서 담詹은 용기, 결단과 같은 마음의 에너지를 담고 있는 넉넉한 그릇詹을 뜻한다. 그 그릇에 담겨있는 기운이 소설(泄:모여있던 물질이나 기운을 내보내는 기능)할 때 담대함이 나온다. 그 반대로 담소(膽小)하면, 결단을 내리지 못하거나 줏대가 없게 되는데 이런 사람을 일러 "쓸개 빠진 놈"이라 했다.


한편 처마 첨檐에서 이를 첨 집안에서 하는 말소리가 반사되는 처마를 뜻했다. 목은 처마를 받치는 도리를 뜻한다. 여기서 우러러볼 첨은 처마의 모양을 나타내는 모양자로 차용되었다. 언덕 위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厃)이, 처마 위에 장식으로 설치하는 잡상(인간이나 동물 형상)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글자를 만든 사람들의 재치가 돋보이는 글자이지만 지금까지는 그 진가를 몰라주고 엉뚱하게 해석하였다.


처마는 첨하(檐下)가 연음화 되어 우리말로 굳어진 말이라고 한다. 처마는 지붕이 도리 너머로 돌출된 부분으로 비나 눈을 막고 직사광선을 차단하는 기능을 한다.


기와지붕의 처마는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동성이 떨어지는 중국이나 일본의 처마와 달리 우리나라의 기와지붕은, 처마를 앞으로 길게 빼기 위한 과학과, 미적 아름다움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세계적인 걸작품이다. 기와지붕은 양쪽 모서리 부분이 안에서 바깥을 향하여 곡선을 이루면서 돌출되어 있다. 이를 솟을 매기라고 부른다. 한편 정면에서 볼 때는 양쪽 추녀 쪽으로 갈수록 점차 높아지는 곡선을 이루는데, 이를 앙곡(昻曲)이라고 한다.


     宇            于                도지개

솟을 매기와 앙곡을 묘사한 글자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집 우宇자이다. 우주(宇宙)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우는 지금까지 한자 건축자의 의도가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 우于는 지금까지, 형태와 상관없이 그저 소리를 나타내는 음요소로만 치부되었다. 허신은 우于에 대해서 "어조사(於)이다. 기운이 퍼져 나가는 모양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갑골문을 보지 못한 설명으로, 후대에 변형된 글자체만 보고 오인한 것이다.


우于의 갑골문은 앞서 다른 글(지혜와 지식은 이렇게 말한다)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도지개를 그렸다(위의 一은 두께를, 가운데 十은 볼록하게 솟아오른 모양을 간략하게 표현한 형태이다). 도지개는 활을 만들 때, 트집 가거나 뒤틀린 활의 모양을 바로 잡는 틀을 가리킨다. 활의 줌통 모양과 동일한 도지개의 모양에서 '구부리다'는 뜻이 나왔다.


처마 첨檐이 보여주듯이, 처마는 인간이 우러러보는(厃) 높은 곳으로 그 궁극은(詹) 천정(天頂)이다. 이로부터 집의 처마이자 천정으로서, 인간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詹) 무한한 공간과 시간의 영역인 우주를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천자문]에서는 우주홍황(宇宙洪荒)이라고 했다. 우주는 아직 인간이 개척하지 못한 넓은 황무지라는 뜻이다.


경복궁에 가면 꼭 한 번 처마를 쳐다 보기 바란다瞻(쳐다볼 첨). 그리고 작은 소리로 감사를 전해보라. 그 소리가 처마에 이르러 조상들의 숭고한 기상이 메아리치며八 돌아와 쓸개에 담길 것이다. 그 담대함으로 세계로 뻗어 나가는 대한민국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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