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특별한 존재

이석원 산문집, 『보통의 존재』를 읽고

by 최지훈

이십 대 초반이 지나갔다. 좀 정신 차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현실적 자문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닐 무렵, 영원할 줄 알았던 한 청춘의 생(生)은 어느덧 이십 대 후반이 되어있었다.


나의 이십 대 초반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위로 기대감이 샘솟는 나날이었다. 지금은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하는 것이 더 많아졌다. 당위와 의무가 권리를 압도하고 있는 요즈음, 내 삶은 어디가 불(火)인지 분별하지 못한 채 달려드는 데 급급한 불나방이 된 듯하다.


'나' 중심으로 살았다. 인생에서 나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부모님의 고생을 당연시 여기던 때도 있었다. 당신의 손 마디마디가 거칠어지시며 땀 흘려 번 돈으로 지원해주신, 먹고 마시고 입는 모든 것들, 학비며 집세며 나를 뒷받침하는 물적 토대가 전부 부모님의 덕택임에도 그때의 나는 어렸고 철이 없었다.


'나'에게만 충실히 사는 것이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음을 깨달은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켜야 할 사람들이 생기면서부터다. 하고 싶은 일만 고집하는 건 어릴 때나 허용될 일이다. 이제는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빠 등 갖가지 '노릇'을 벗 삼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자연히 인생의 꿈과 포부는 작아졌으며 생각은 현실적으로 바뀌어갔다. 그렇게도 되기 싫었던, '현실에 맞추어 사는' 사람으로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나름 살아오면서 '특별한' 사람이 되리라 믿었다. 내게 특별한 사람이란 소위 말하는 '훌륭한' 사람이다. 누구나 우러러보고 동경해 마지않는,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진 존재. 그러나 나 역시 그저 그런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자조적 푸념에 빠져들 때쯤, 구세주처럼 한 산문집을 만났다. 이석원 님의 『보통의 존재』.


저자는 지극히 솔직했다. 본인의 내밀한 사생활부터 치부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이혼, 얼굴에 대한 콤플렉스, 가슴 아픈 가족사를 그는 그의 속살 위에 문신을 새기듯 써 내려갔다. 그중 내 마음에 파고든 문장을 소개한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하나둘 포기해야 하는 것이 그만큼 늘어남을 뜻하고, 결국엔 그렇게 커져가는 빈자리를 감당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바로 어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다짐했다. 특별한 어른이 되어야지, 현실이라는 말을 핑계로 꿈을 포기하는 평범한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 현실에 맞추어 타협하며 살아가는 어른들에게 노력이 부족하다거나 집념이 부족하다는 등의 잣대를 들이대며 핀잔을 던지곤 했던 게 나였다.


나도 어른이 되었다. 어른은 모름지기 삶의 무게를 버텨내야 한다. 내게 그 무게는 3인분이다. 남들보다 비교적 일찍 결혼하여 곁에는 아내가 있고 얼마 전에는 아들이 태어났다. 주변의 또래 친구들보다 앞서 가는 듯하나 또 그런 것 같지만은 않은, 묘한 기분이 든다. 이상과 현실의 격차 앞에서 청춘으로서 느끼는 무력감이 나를 엄습할 때, 이런 생각이 든다.


‘사실상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내 삶에 치중하기보다 밥벌이를 위해 세상에 뛰어들어야 하는데, 내 인생 이대로 괜찮은 걸까.’


저자의 문장이 답을 주었다. 포기가 남긴 빈자리를 감당하고 받아들이는 게 어른의 삶이라는 것, 하여 내가 보통임을 받아들이고 나도 다른 사람들과 별 다를 바 없음을 자각하는 것. 이 같은 어른의 삶이 오히려 ‘특별하다’는 사실. 정신승리라 불러도 좋다. 다른 사람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와중에도 그 이면에 있는 본인만의 고유한 멋이 있는 법이니까. 자기 삶을 담담히 털어놓은 저자도 그 멋을 아는 것이다. 비록 그 삶이 남루하고 부끄러울지라도, 저자는 그렇게 믿고 살아왔기에 보통의 '특별한' 존재이다.


"내가 그토록 달아나고 싶고, 회의하던 것들로부터 나와 내 삶이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인 순간, 나의 모든 아쉬움은 그제야 비로소 위대한 유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바로 잘나지 않은 내 가족과 친구들, 무엇보다 늘 부끄럽게 여기던 나 자신까지 바로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수많은 것들이 내게 건넨 힘과 그들과 함께했던 세월 덕택이었습니다."


세상에는 모든 보통의 존재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보통의 존재는 모두, 아주 '특별'하다.


오늘도, 보통의 특별한 하루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