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에서 구원으로

노력하는 자의 끝, 구원

by 최지훈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괴테, 『파우스트』 中)”


현재 나의 감정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한, 적확한 단어 ‘방황’. 나는 분명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토익 점수를 높이기 위해, 한국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취업에 필요하다는 각종 스펙을 갖추기 위해.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 ‘노력’이란 걸 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국어를, 영어를, 수학을 공부했다. 그때는 대학만 가면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걸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가능성 많은 젊은 이십 대 초반이었다. 그래서 미뤘다. ‘훗날의 언젠가’로 진로를 결심할 시점을 유예해둔 것이다. 그 상태 그대로 몇 년이 흘렀다. 사람이 좋아 술에 심취해보기도 했고, 갖가지 교양 과목을 돈키호테처럼 끌리는 대로 들어보기도 했다. 내 마음의 방향을 알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다. 대상만 달리할 뿐, 나는 여전히 노력하고 있으나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8년이 흘렀다. 향년 28세, 이제는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이십 대 초반의 나는, 큰 꿈을 접고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두고 ‘왜 저렇게밖에 살지 못하느냐’며 무시했다. 시간이 지나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포부는 작아지고 생각만 많아진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 세운 비현실적인 계획이나 이상은 저버린 지 오래다. 세무사니 회계사니 하는, 이른바 전문직 자격증에 도전할 용기마저 사라졌다.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뚜렷한 사명감이나 열정 없이 그저 남들이 도전해보니까 떠밀려서, ‘나도 해볼까’와 같은 어정쩡한 마음으로 노력을 시작하는 게 망설여지는 것이다. 화려한 면만 보고서 위험을 감수하기에는 이미 철이 꽤 들어버렸다.


도서관에 가서 취업과 하등 상관없는, 학문적으로 관심 있는 정치나 역사책에 파묻혀 몰두하다가도 불현듯 떨쳐낼 수 없는 질문이 떠오른다.

“뭐 먹고살지?”


밥벌이에 관한 물음이다. 내가 찾을 밥벌이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지와 내가 만족할만한 업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어릴 때부터 성공에 대한 조언을 자주 들었다. 자기 개발서에서든 TV 영상에서든 성공한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했다.


"목표를 빨리 정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28살이 되었는데도 목표가 뭔지 모르겠다. 성공하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온 것 같은데, 무엇의 성공을 바라고 노력해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살아가는 것만 같다. 주변 친구들은 일찍 진로를 정했고, 그 길로 나아갔다. 그들은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다. 나만 덩그러니 남아 수동태 인생을 살고 있는 느낌이다. 그나마 과 전공이 상경계열의 경제학이어서 그와 연계된 취업자리를 알아보고 자기소개서를 작성해보다가, 작문이 쉬이 되지 않을 때면 다시 토익 책과 한국사 기출문제집을 집어 든다.


날이 갈수록 조급해진다. 다음 발을 어디에 내디뎌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노력하는 자의 방황이다. 정녕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런 게 있기나 할까, 지금 하는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스펙 공부나 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깊어지려 하는 그 순간, 『파우스트』의 또 다른 한 문장이 위로가 된다.


“노력하는 자는 구원받을 수 있다.”


오늘도 이 문장을 붙잡고 하루를 살아낼 것이다.


방황에서 구원으로. 그래, 나는 구원받을 수 있다. 노력하고 있으므로. 구원받을 수 있다. 방황하고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