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늦게 시작한 나의 이십 대
8살, 인터넷을 처음 접했다. 초등학교 입학 후 가정 방문 컴퓨터 수업을 들으면서부터다. 이찬진 컴퓨터 교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외동인 나에게 컴퓨터와 인터넷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시시각각 폭포처럼 쏟아지는 정보 덕분에, 그들과 함께할 때면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사회의 구성원이 되려면 들어가는 사이트마다 회원가입을 해야 했다. 기입해야 하는 여러 항목 중 특히 한 가지에 눈이 꽂혔다.
‘비밀번호 힌트’
고를 수 있는 질문은 열 개가 족히 넘었는데, 나는 항상 ‘나의 보물 1호는?’을 선택했다. 매번 답이 달라지긴 했어도 답을 적던 그 시간의 설렘과 두근거림은 아직도 타자를 치던 손 끝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갓 초등학교 들어간 꼬맹이 주제에 보물 1호가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깊이 생각했을까? 어릴 때부터 나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왔다. 물론 회원가입할 때 그 잠깐뿐이었겠지만. 쓴 걸 떠올려보면, 참 소박하다 싶다. 고작 크리스마스 아침에 머리맡에 놓여있던 로봇 장난감이 보물 1호였으니 말이다.
이십 대 후반이 된 지금도, 변함없이 ‘나의 보물 1호는?’ 이란 질문을 던져본다. 이 질문은 이제 더 이상 인터넷 사이트 로그인이나 도와줄 비밀번호 힌트가 아니다. 내 인생에서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지를 알려줄 ‘인생 힌트’다.
많은 단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성공, 명예, 돈. 끝없이 희미하게 스쳐가는 단어들 가운데 선명하게 다가오는 한 단어가 있다. 바로 ‘이십 대’다. 2019년, 내 나이 스무여덟 현시점의 보물 1호는 ‘이십 대’다.
이십 대, 흔히 이 시기를 청춘(靑春)이라 한다. 한자어로 ‘푸른 봄’이라는 뜻이다. 새싹이 움틀 거리고 온갖 새 생명이 깨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계절, 봄. 거기다 푸르기까지 하니, 청춘은 다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나의 아름다운 청춘 이십 대는 남들보다 2년 늦게 출발했다. 수능 시험 준비에 2년을 더 쓴 탓이다. 19살과 20살,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경계에서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재수생(再修生)이었다. 다음 전투의 승리를 기약하는 패잔병처럼 와신상담, 쓸개를 핥고 눈물을 씹어 삼키며 버텨야 했다.
그 해에도 실패해 수험생활을 1년 더 했다. 삼수(三修)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실패자로 불렀다. 그럼에도 2년이나 더 도전한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충실하지 못했던 지난 고등학교 3년 생활에 대한 ‘미련’이 남은 까닭이다.
매미는 15일의 찬란한 여름을 위해 7년을 준비한다. 애벌레에서 성충이 되기까지 그 수없이 긴 세월을 견디고 버텨내야 비로소 매미가 된다.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매미의 맴맴 소리가 들리면 수험생활 시절이 떠오른다. 매미가 견딘 7년과 지금을 위해 웅크려 지내온 나의 2년이 어딘지 모르게 닮았기 때문이다.
다른 애벌레들이 성충이 되었을 때, 매미는 견뎌야 했다. 낙오된 애벌레들이 넌 안 된다고, 절대 매미가 될 수 없다고, 아무리 떠들어대도 매미는 묵묵히 인고(忍苦)했다. 마침내 7년이 지나 매미가 되었을 때, 매미는 보란 듯이 외쳤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미련은 없어!’
청춘이라면 이래야 하지 않을까? 이십 대가 영원했으면 하는 우리 바람과 달리, 청춘은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 시기를 제대로 살지 않으면 미련이란 것이 우릴 괴롭힌다. 8년 전, 그놈의 미련 때문에 수험생활을 2년이나 더 하기로 마음먹었던 그때처럼. 더 무서운 건, 미련이 남아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7년을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수많은 애벌레들이 그러하듯이.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나는 알고 있다. 이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이 시기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이십 대가 꼭 해봐야 할 10가지’라는 포스팅을 봤다. 배낭여행 가보기, 뜨겁게 사랑해보기, 공부에 미쳐보기. 각기 다른 소재들이지만 다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냥 여행이 아니라 ‘배낭’ 여행이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뜨거운’ 사랑이다. 그냥 공부가 아니라 ‘미치도록’ 공부다. 이를 대표할 수 있는 총체는 ‘미련 없는 이십 대’다. 뭘 하든, 미련을 남기지 않고 끝장을 보는 것, 이게 청춘이다.
8년 전 재수를 시작할 때, 수강하고 있던 언어 과목의 인강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해주신 말씀이 기억난다.
“청춘은 앞만 보고 가는 거야. 뒤돌아 보지 않는 거야.”
그래, 청춘들아. 우리는 이렇게 사는 거다. 세상은 절망만을 말한다. 현실과 꿈이 맞붙는 줄다리기 싸움에서 자꾸만 현실이 이기도록 힘을 실어준다. 현실의 무게를 못 견디게 만든다. 그만 포기하라고, 해봤자 안 된다고. 하지만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청춘 합시다!
나도 대학생활 4년 동안, 장교 생활 2년 동안 쉼 없이 달렸다. 2년 늦게 맛 본 청춘이 얼마나 달콤했는지 모른다. 경제학에 빠져 밤새 미친 듯이 공부도 해봤고, 농구에 빠져 무릎 연골이 닳아 심지어 수술까지 받았다. 가르치는 게 너무 좋아 시험기간임에도 과외에 꼬박 며칠을 다 쏟은 적도 있고, 글 쓰는 걸 좋아해 수험생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조회수 10000을 달성하기도 했다. 군인으로 살면서 나라에 대한 애틋함이 더욱 커졌으며, 목숨 바쳐 사랑할 사람을 만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그녀와 결혼했고, 곧 아이 출산을 앞두고 있다.
스무여덟 살. 이십 대의 끝자락에 서서 다시 외쳐본다.
“나의 보물 1호, 2년 늦은 이십 대.”
처음엔 늦었다 생각했지만 결코 늦지 않은 것이었다. 한 번뿐인 인생, 한 번뿐인 청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래서 더욱 소중한 내 젊은 날. 푸르디푸른 봄으로 내 남은 2년, 미련 없이, 가슴 뻐근하게 살아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