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 제안서
필요한 물건을 사려 철물점에 가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아는 척하여 고개 돌려보니 인근 편의점 사장 부인이었다. 아내 하곤 죽마고우처럼 지내는 사이다. 왼팔에 깁스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어, 인사 끝에 연유를 물어보니 거의 아물었다고 둘러댄다. 자세히 물어볼 수도 없어 어물쩍 지나고 말았다.
저녁 식사 때 아내에게 친구 이야기를 전하니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긴다. 그냥 자다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것이다. 아니, 저 정도로 다칠 수 있다고?
어느 날 새벽 우리 부부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느닷없이 몸 위로 토사가 쏟아지듯 우두둑 떨어져 내렸다. 정신 차려보니 이불과 함께 떨어졌기 망정이지, 타박상보다 더한 사고가 날뻔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1인용 침대를 사용한 대신, 나는 바로 옆 바닥에 매트리스를 펴서 자던 상황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잠을 청하는데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천연스럽게도 아내 숨소리만 고르게 들려올 뿐.
멀뚱멀뚱 천장을 쳐다보다 요즘 생활을 뒤돌아보니 불편하기 짝이 없다. 슬레이트집의 방 세 칸을 턴 구조인데 이삿짐으로 가득 채워지고 끄트머리 세 평 남짓이 생활공간이다. 평소보다 엄청나게 압축된 공간, 비록 임시 거처라지만 몸이 먼저 불편함을 호소한다.
아내는 몇 달 사이 주택 리모델링에 관심이 부쩍 높았다. 부모님의 혼이 서린, 35년 풍우상설 견뎌낸 본가라지만 어머님마저 돌아가시고 나니 고색이 더 창연하였다. 이참에 노후주택을 보수하여 쾌적한 공간에서 여생을 보내자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큰방, 서재에 작은방 세 개가 딸린 이층 벽돌조 슬래브 구조였다. 한때 붐이 일었던 목재를 활용하여 벽면, 천정을 마감 처리했고, 동 파이프 석유 난방에 유리창이 많은 구조였다.
방이 많다 보니 효용성에 있어서, 좁은 거실과 주방은 생활공간 확보에 제약이 따랐다. 빛바랜 목재 가벽(加壁)에서 내뿜는 습한 냄새, 취약한 냉난방 구조 더군다나 수도관이 앞 상가와 분리되지 않아 말썽을 빚기도 했다.
부부간에 이견이 왜 없겠는가. 그해 아들 결혼으로 적잖은 돈이 들었으니 이삼 년 후에 그것도 1, 2층 순차적으로 하자는 반면, 아내는 부족한 자금은 융통하면 되고 살림하는 집에 2차 공사란 말이 안 된다고 했다.
평행선을 달리던 시각에 균형이 깨진 것은 사촌의 조언이었다. 인근에 사는 동생인데 이왕 마음먹었으면 한 해라도 빨리하라고 권했다. 그 연유를 되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무슨 선문답 같아 피식 웃고 말았는데, 곰곰이 되씹어보니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하나는 리모델링의 효과-주거 편의성이나 정서적 안정-측면에서 본다면, 향유할 세월을 조금이라도 늘리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기백이 굳건할 때 큰일을 해야 뒤탈이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일 것 같았다.
세 곳의 복수 견적을 받아 본 후 최종 낙점 업체는 창호 새시 전문 대리점이었다. 첫 회동에서 나는 『설계 제안서』를 꺼냈다. A4 용지 3장 분량이었다. 적이 당황하는 모습이었으나 조목조목 요구 사항을 읽어 내려갔다.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명확히 인지했으면 했다. 난색을 보이는 부분은 조정하여 2차 제안서로 내밀었다. 솔직히 이 서류가 뒷날 든든한 조력자가 될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