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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운 Aug 21. 2023

이상근

 작년 가을까지만 하더라도 땅두릅 농사가 재미도 예전 같잖고 힘도 부쳐 그만 접기로 했었다. 밭이 위아래로 붙어 있는데 위는 서울 숙부님, 아래는 큰집 것이다. 두 밭을 합한 연면적이 약 550평 정도이니 그동안 혼자 고생깨나 했다.      

 연말 무렵 숙부님이 내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밭을 이전등기 제비용만 부담하고 그냥 가져라고 했다. 증여도 아니니 경우가 맞지 않았다. 며칠 후 인근 법무사에서 작성한 매매계약서와 함께 일정 금액 성의 표시를 했다.

 

 내 밭이니 제대로 경작해 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올해 2월 오래된 두릅 밭을 갈아엎고 새로 종근을 심어 보기로 했다.


 굴삭기로 긁어낸 두릅 뿌리를 적당히 작두질하여 여분의 땅에 파묻었다. 이어 로터리 작업, 이랑 비닐 멀칭, 두릅 눈이 틀 때 다시 옮겨심기 등. 농사는 다 시기가 있는 법이니 쪼그리고 앉아 주야장천 매달렸다.      

 문제는 종근을 내 밭에 옮겨 심어도 절반 이상 남아돌았다. 관심을 보이던 동네 어른들에게 팔아보기도 하고, 친구를 불러 한두 포대 인심까지 썼다. 그래도 남았다. 골똘히 고민한 끝에 처가 동네 아내 밭으로 옮겨심기로 했다.

 

  3km 떨어진 두 밭에 종근 심기, 큰집 밭 두릅 채취 판매까지 일끝이 보였다. 다음은 두릅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고랑 잔풀들을 매는 것인데 앞일에 비하면 쉬엄쉬엄해도 . 허리를 펴고 고개 들어보니 어느새 신록의 6월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들 결혼식이 그달 하순에 잡혀 있는데 시골 사람이라 한들 숯검정으로 갈 수야 있겠는가. 피부 관리 모드로 전환했다.     


 어느 날 승용차에서 내리는데 오른쪽 엉덩이 부분이 뜨끔했다. 이게 뭐지? 조금 걸으니 통증이 가셨다. 그렇게 시작된 증상이 잊을만하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앉아 있다가 혹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걸을 때 통증이 심했다. 어떤 날은 엉덩이에서 종아리 아래까지 저리기도 했다.

 

 문제가 예사롭지 않다 느껴 인터넷 광폭 검색을 시작했다. 먼저 4자 다리 테스트를 해보니 다행스럽게 고관절 질환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근이라는 생뚱맞은 용어가 나왔다. 이상하게 생긴 근육? 근육을 발견한 이의 이름? piriformis muscle(궁둥 구멍근)이라고? 더 헷갈렸다. 그냥 한자 병기를 하든지.      

  이상근(梨狀筋)이란 서양배처럼 생긴 엉덩이 속 근육이었다. 이것이 과도하게 긴장, 비대, 염증 등이 발생해 좌골신경을 압박하는 증상이다. 오래 앉아 있어 발생하는 직업병이란 사실을 처음 알았다.


 찬찬히 되짚어 보니 엉덩이 쿠션 스트랩이 허벅지에 꽉 쪼이는 것을 선택하여 장시간 앉아 일했으니, 이게 사달이 난 모양이었다.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는 처방인데 인근 의원에 가보니 물리치료, 근이완제, 진통소염제가 다였다.   

   

 같은 동작을 당분간 삼가라고 해서 밭일은 엄두도 못 내는데, 약 복용이 끝나면 통증이 재발했다. 혼주로서 절뚝거리는 모습은 피하고 싶어 전날 아들 집 근처 정형외과 진료를 받았다.       

 증상 발생 초기임을 감안하여 척수신경총 신경절 차단술 주사 요법을 권유했다. 한 번으로 증상이 호전되지 않으면 30~40일 후 재시술할 수 있으며, 실손 보험 적용되니 부담 갖지 말라는 립서비스까지. X-레이, 체외충격파, 레이저 치료 등 풀세트 받으면서 촌놈이라고 덤터기 씌우는 것 같아 떨떠름했지만 내 코가 석자였다.        

  

 예식은 잘 마치고 시골로 되돌아와 그럭저럭 지내다가 처방 약이 끊어지니 통증이 또 도졌다. 저녁 식후면 인근 대학교 400m 트랙 12바퀴 돌기를 꾸준히 하고 특화된 스트레칭을 수시로 했다.

 하나는, 누워 오른쪽 무릎만 세운 채 엉덩이를 살짝 들어 왼쪽, 무릎은 오른쪽으로 최대한 비튼 자세로 12초 버티기 한 세트로 5.

 두 번째는, 누워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쪽에 올려놓고, 양손으로 왼쪽 허벅지를 끌어당겨 12초 버티기 한 세트로 5.     


 거의 한 달이 지날 무렵 지긋지긋한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데, 신경 주사 또는 스트레칭의 효능인지 몰라도 어깨춤이 절로 날 지경이었다. 행복이란 이처럼 멀리 있지도 거창하지도 않은 소소한 일상에 깃든 것이니,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도 남았다.

 

 서울 다녀온 다음 날부터 장맛비가 시작됐다. 3쯤 되었을까 밭을 돌아보니 고랑마다 풀이 허리만큼 자랐다. 밭농사 7년에 이런 꼴을 처음 보면서도 속수무책이니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희희낙락거리며 자기 세상인 양 밭을 유린하는 잡초들의 온갖 재잘거림이 귀에 거슬렸다.      

 

 이상근 증후군이라는 듣보잡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가 순한 양이 되어 제 발로 걸어 나가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헛것을 체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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