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지, 축사 준비하실 수 있겠어요?”
“생뚱맞게?”
“장인어른은 안 하신다고 하심, 아빠가 하시는 게”
한 시간쯤 지나 가족 단톡방에 사돈이 해야 하는 이유를 댔다. 첫째로는 그분이 내보다 연장자이고, 둘째는 생활근거지가 그곳 서울이고. 마지막으로 상처(喪妻)의 아픔을 딛고 나서는 모습에 하객들 호응이 높지 않겠냐고 했다.
“그럼 두 분 다 하시면 하실거예용?”
하~ 이 녀석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작년 연말경 양가 상견례 자리에서 결혼식은 검소하게 하자고 마음을 모았다. 우리 부부는 예단을 받지 않겠으니 그 돈은 살림에 보태라고 했다. 두 사람은 예전 직장에서 2년간을 교제하여 서로를 면면이 잘 아는 터, 결혼 준비는 물 흐르듯 했다.
한 달 남짓부터 결혼일이 황소걸음처럼 다가왔다. 결혼한 친구들 모습을 보고 입버릇처럼 장가 안 가겠다던 녀석. 기특하다만 부모로서 마음이 이래저래 분주했다. 그럼에도 즐기는 스트레스였다.
요즘 결혼식은 예전과 다를뿐더러 이벤트성이 강하다는 말에 유튜브를 봤다. 진중해야 할 식순인 주례사, 폐백도 없는 게 다반사였고 양가 부모의 축가, 축사도 많았다. 부모가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게 아니라 적극적 참여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었다.
사돈어른이 뒤늦게 축사를 수락했다니 짐은 덜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수 없었다. 사회자가 느닷없이 신랑 아버님도 축사해 달라고 거듭 요청한다면 어떻게 대처할까? 식순에 없으니 딱 잡아떼? 모르는 일이니 대비도 해야겠고 무엇보다 신혼여행 다녀오면 건넬 덕담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몰래 준비하도록 했다.
법정 스님의 주례사가 떠올랐다. 책을 펼쳐보니 아닌 게 아니라 연필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시집, 장가들면 꼭 얘기해야겠다던 풋풋한 바람도 오랜 잠에서 일어나 앉는다. 구절 중에서 두 개를 뽑았다. 물론, 법정 스님의 생애 유일했던 주례사에서 인용했지만 세태에 걸맞게 다듬었다고 밝힐 것이다.
《하나는 매달 인문학 서적 1권씩 부부가 각자 고르고, 시집은 협의하여 1권 만을 꼭 돈을 내고 사도록 해라. 인문 서적은 다 읽은 후 바꿔서 읽고, 시집은 시간을 내서 번갈아 가며 낭송하도록 해라.
가슴이 황량하면 생활의 리듬이 깨어지기 쉽고 자기 성찰의 여유마저 사라진다. 신혼부부 때부터 삶이 한 편의 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책 읽는 부부의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정신적 유산이 될 것이다.
둘째는 매사에 근검절약이 몸에 빼도록 해라. 물욕에 매몰되면 맑은 정신을 잃게 된다. 광고나 충동구매, 지름신으로부터 흔들림 없어야 하고, 조금 부족한 듯한 가운데 멋지게 살 수 있어야 한다.》
결혼식이 시작됐다. 건너편 자리를 얼핏 보니 예상대로 혼주석에 혼자 앉아있었다. 당연히 양가 어머니가 나와 불을 밝히는 화촉식은 생략하고 진행됐다.
신부 아버지가 단상에 올라 ‘성혼 선언문’을 낭독하고 이어서 '축사'가 이어졌다. 분량만 비교적 짧을 뿐 주례와 진배없어 보였다. 다행히(?) 사회자는 다음 식순으로 넘어갔다.
‘양가 부모님께 인사’에서 사돈어른은 인사를 받고 가볍게 포옹으로 끝났다. 돌아서서 우리 부부에게 다가왔다. 아들을 바라다보니 쭈뼛쭈뼛하다 시선을 떨구고, 새아기에게는 괜히 안쓰러워 시선을 피하다 보았다. 해맑은 눈빛으로 날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얘 좀 보게!’
‘모친을 여읜 충격에 심리치료까지 받던 얘가 맞아?’
앞서 부녀간에 인사와 포옹이 있었지만 으레 젖은 눈시울이 아니었다. 이십 대 끝자락에 찾아온 시련이 이토록 속을 단단히 채우고 꼭지를 여물게 한 것인가. 내가 빙긋이 웃으며 고개 끄덕이자 그제야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인사한다.
‘심지가 곧은 이 같으니..’
3시간 후 우리 부부는 집으로 돌아갈 시외버스에 올랐다. 케이지를 떠나 비상하는 새처럼 아니 그보다 더 자유롭게 서울을 벗어날 것이다. 아들 내외는 내일 오전 런던으로 떠난다고 했다.
'얘들아, 미안해. 이렇게 먼저 신혼여행 떠나서. 덕담은 며칠 후에.. 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