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바닷가 산책하려 집을 나섰다. 읍 중심부를 벗어나 천변 따라 걸으면 사방이 훤히 트이는 간척지가 나타난다.
지방하천이 방조제 수문 방향으로 곧게 흐르고, 양쪽으로 갈대 군락지가 발달 돼 있다. 방죽 위는 흙바닥을 잘 다듬어 놓아서 산책하기에 불편함이 없다.
무심코 걷던 걸음을 멈칫하게 한다. 하천을 내려다봤다. 거슬러 솟구치는 커다란 물고기 소리, 숭어로 보였다. 오수를 즐기던 백로마저 버거운 날갯짓으로 자릴 뜬다.
방조제 위로 올라가니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비상하는 바닷새 조형물 계단을 올랐다. 오늘도 하늘이 내려앉았다. 아끼는 것은 이따금 만나야 정이 더욱 농밀해진다고 했던가. 내게는 바다가 그렇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와, 도연명도 각각 28세와 41세 때 월든 호수와 고향에 왔지만 다들 3년 이상 머물지 못했다. 어머님의 품 같은 이 바다를 어찌 또 떠나겠는가.
바다
-문무학
‘바다’가 ‘바다’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 ‘받아’ 주기 때문이다.
‘괜찮다’
그 말 한마디로
어머닌 바다가 되었다.
두어 달 지나 어머님 2주기가 다가온다. 입관식 때 장례지도사가 우리에게 묻던 말이 있었다. 더 넣을 것이 있냐고. ‘우리 내외 수의는 이미 장만하였으니 일 생기면 챙기라’는 어머님 평소 당부가 있었다. 앞서 타계하신 아버님은 물론 어머님마저 그 유지를 받들었기에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작년 말 아버님 서재에서 아주 특별한 것을 발견했다. 한자로 또박또박 쓴 ‘혼서지’와 함께 사돈에게서 받은 ‘연길 단자’였다. 무려 70여 년이 지난 서류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니, 우리도 까맣게 몰랐다.이왕이면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아쉬움마저 교차했다.
연길단자는 얼핏 봐도 동네 어르신이 대서(代書) 한 것 같지만 혼서지는 달랐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버님 글씨, 그러니까 19세이던 음력 11월(仲冬)에 직접 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버님은 평소 내외지간의 일은 우리에게 일절 말하지 않았다. 대개 그 시대 분들이 그러하듯 과묵한 어른이었다. 혼서지의 마지막 쓰임에 대해 익히 알고 계셨겠지만, 만년에 찾아온 노환으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
"어머님, 제가 그날 손 붙들고 애통해하던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아마 몇 번이나 뒤돌아보셨겠죠.
생각에 보세요. 열일곱 꽃다운 나이 때 양가 집안에 혼담이 오가다 젊은 청년이 보내온 서간, 혼서지 말입니다. 물론 (증조) 할아버지의 이름을 빌렸지만.
친지 어르신들이 그 글씨를 보고서 기교를 부리지 않고 획이 올곧다 칭찬이 자자했을 겁니다. 기백이 한창 넘치던 시절에 쓴 혼서지를 종이 신발로 또는 품기만 하셔도, 낯설고 두려운 여정에 얼마나 큰 위안이 됐을까요. 제마저 챙겨드리지 못해 가슴이 저밉니다.”
바닷새 조형물 난간에 한동안 기대섰다. 상념에 젖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해수면 위를 쓰다듬는 미풍이 마치 어머님 목소리처럼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