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부부가 큰방 자개농 안의 부모님 유품을 정리하기로 한 날이다. 크고 작든 집안일은 남자 혼자 할 일이 아니지 않던가.
아버님이 먼저 돌아가시고 나서 낡은 슈트나 점프, 코트는 혼자 알아서 정리했다. 올해 유월에 어머님마저 우리 곁을 떠나셨는데, 이 일을 차일피일 미루어 둘 수 없었다.
왼쪽 옷장을 열었다. 부모님의 코트나 긴 옷이 걸려있던 곳인데, 지금은 깨끗한 옷들만 가려서 오른쪽 옷장으로 옮겨 놓은 상태다. 바닥에는 요양병원에서 사용하기 위해 인터넷 구매한 기저귀와 깔개 매트 잔량들이 일부 남겨져 있었다.
아래 서랍을 여니 뜻밖에 VHS 비디오테이프가 무더기로 쏟아졌다. 가족행사나 명절 때 촬영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버리기 아까워 모와 둔 것 같다. 다 들어내고 보니 바닥에 무슨 패찰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어머님의 게이트볼 회원증이었다. 사진은 60대 후반쯤으로 잔주름, 기미 한 점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인생 절정기를 누리던 시기로 보였다.
눈길을 끄는 것은 앞뒤면의 인적사항이다. 아버님과 달리 어머님은 글쓰기를 꺼려했다.모임에 나가면 교장선생 사모님이라 불려서일까. 아버님이 쓴 강직한 필체 뒤에 가려진 살가운 배려가 가슴 언저리에 밀려온다. 한참을 그렇게 만지작거렸다.
가운데 이불장 문을 열었다. 이불이 퇴적층처럼 켜켜이 쌓여있다. 비교적 깨끗한 캐시밀론 이불과 담요 두세 개는 따로 구분했다. 나머지 것들은 모두 예단 이불세트임을 쉽사리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 집은 형제만 다섯이다. 한 겹 한 겹 들어내니 며느리, 사돈네의 축원들이 오랜 잠을 깨며 그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모두가 시부모님의 장수를 기원함일 것이다. 만년에 비록 병환에 시달렸지만 89, 90세를 누렸으니 소임을 다한 게 아니겠는가. 대용량 생활쓰레기봉투에 고이 담아냈다.
마지막으로 오른쪽 옷장인데, 어머님의 낡은 옷가지만 가려냈다. 아래 서랍을 열었다. 이외로 색조 고운 보자기들이 많았다. 부모님은 평소 마련한 수의를 귀띔해 주셨고 우리는 그 유지를 받들었다. 그럼에도 여분의 수의가 더 나왔다.
보자기를 하나하나 풀 때마다 부모님의 한복들이 나오는데 명절 때 자식, 손자녀들의 큰절을 받던 눈 익은 옷들이다.
마지막 보자기, 어머님의 고운 한복 치마저고리가 나왔다. 순간 가슴이 벅차고 아려왔다. 이 옷을 언제 보았기에 이럴까? 저고리만 방바닥에 펼쳐보았다. 연한 청자 색조에 깃, 끝동은 감청색으로 돌리고 꽃 자수를 놓았다. 감청색 고름 끝에도 두 개씩 꽃 자수가 보였다.
어머님의 포근한 품 안이 열렸다. 시간이 흐름을 거스른다. 스치듯 지나는 잔영들. 유년기 외가를 찾아온 어머님, ‘이리 오너라, 한 번 안아보자.’ 두 손 벌린 품에 이르러서야 멈춘다.
부모님의 한복은 볼수록 힘겨워 낡은 옷가지와 더불어 옷 수거함에 넣고 터벅터벅 돌아오던 길. 긴 침묵이 따랐다.
법륜스님 즉문즉설에서도 ‘제법(諸法)은 공(空)하다.’하여 부모님의 물품들을 사용함에 하자는 없다 했다. 나머지는 버리기 아까운 것들이기에 세탁만이라도 해놓고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뜻을 모았다.
저녁 식사 후 달 밝은 옥상에 올라 한참을 서성였다. 초등학교 졸업 후 혼자 부모님 곁을 떠나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다. 부모님과 합가 한 지 불과 10년. 비록 힘들었지만 부모님의 만년을 같이 보낸 나날들이 이제와 뒤돌아보니 금싸라기 같았다. 오늘 마지막 짐을 정리함에 있어 애닮은 마음이야 오죽하랴마는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 몇 번을 되뇌었던가.
그날 밤 서재에서 발견한 빛바랜 사진 한 장. 일산 호수공원 한울광장에서 어머님과 우리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 그 한복 저고리를 입고 계셨다. 분양받아 입주하던 그 무렵, 입택 축하하려 먼 길 마다하지 않은 어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