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집행유예

90년대

by 소운

차창을 조금 내리자 새벽의 차가운 기운이 밀려 들어왔다. 이 지역에도 눈이 내렸지만, 폭설은 아닌 것 같다. 먼 산자락과 들녘의 응달에만 잔설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시계는 아침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설을 맞아 본가로 가기 위해 17시간을 달려왔다. 그 많던 차량과 미어터지던 고속도로를 벗어나니 온몸이 파김치가 된 듯했다. 하지만 지난 추석 때 24시간에 비하면 준수한 편이었다. 아직 1시간 정도 더 가야 고향에 도착할 수 있다.

“자는 애들에게 찬바람은 안 좋아요.”

옆에 있던 아내가 깨어있었다.


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다. 아스팔트는 비가 내린 듯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평지를 지나자 오른편으로 완만한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가속 페달을 밟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는 30도가량 왼편으로 휘어졌다. 커브 오르막길이라 가속과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떼고 여분의 속도만으로 좌회전하려는 순간, 이상한 징후가 감지됐다. 뒷바퀴가 원심력에 의해 바깥쪽으로 살짝 밀리는 것이었다. 동시에 차 하체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쏴르르’

소름이 돋았다. 무의식적으로 브레이크에 발을 살짝 올렸다.

“이런!”

이번에는 차량 전체가 도로 오른쪽으로 주욱 밀렸다. 도로 가장자리는 한 사람이 다닐 만큼 좁았고, 흙, 돌멩이, 잔풀들이 뒤섞여 있었다. 연약한 가로수 두세 그루, 그 아래는 보이지 않았다. 멀리 바다와 산만 보일 뿐이었다.

오른편 바퀴들이 아스팔트를 벗어나자 둔탁한 소리가 하체에서 들려왔다.


“여~보! 왜 이래요?”

아내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외마디 소리에 자던 아이들도 깨어났다.

‘이렇게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래, 단판을 짓자!’

안 떨어지려고 꽉 밟고 있던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버렸다. 순간, 성난 투우처럼 차량이 좌측 사선 방향으로 쏜살같이 넘어갔다. 급히 핸들을 반대로 꺾어 간신히 제 차선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브레이크에서 발을 뗄 때까지 좌측 시야는 블랙아웃 상태였다. 시선은 오로지 우측, 상황 발생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반대 차선에서 오는 차가 없었다.


현장을 조금 벗어나 차를 세우고, 혼비백산한 넋이 온전히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기억을 되짚어봤다. 마치 연사 기능이 있는 카메라로 피사체를 찍듯이 모든 순간이 또렷하게 재생되었다. 불과 3~4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시간이 더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극한 상황에서 어쩌면 그렇게 대담할 수 있는지 의문도 들었다.

한사코 만류하는 아내를 진정시키고, 차를 돌려 그 자리에 다시 가 보았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현장을 직접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왼쪽으로 휘어진 도로는 생각보다 평지에 가까웠다. 판단의 오류였다. 같은 경사 각도로 읽어 들인 것이 화근이었고, 젖은 도로는 살얼음, 즉 블랙아이스였다. 도로 가장자리로 다가갔을 때, 십여 미터쯤 축대 아래 황토밭이 혐오스럽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삶과 죽음은 도로와 밭처럼 그렇게 가까이 붙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사형선고를 받고 나온다. 다만 그 집행만 유예될 뿐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총각 시절에도 차량 전복 사고로 불귀의 객이 될 뻔하지 않았던가. 또다시 집행이 유예된 것이다.


판결 전문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집행유예에 처한다”는 주문만 있을 뿐, 판결 이유는 밝히지 않는다. 이는 내가 그런 능력이 있으니 스스로 소명해 보라는 뜻인 것 같다. 그렇다면 유예기간은 왜 빠졌을까? 아마도, 내가 교만의 나락에 빠지지 않게 경계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고향 집 앞에 도착했다. 내려서 보니 범퍼와 펜더 하단부에는 눈 얼음과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먼 여정이 얼마나 험난했는지를 증명하는 것 같았다. 보닛과 루프에 얼어붙은 눈보라의 긴 자국들은 마치 저승사자가 할퀴고 간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먼저 와 있던 동생이 마중을 나오며 말했다.

“이야, ‘Back To The Future’에 나오는 차 같네!”

혹한을 뚫고 남쪽으로 날아온 것처럼 보였나 보다. 나는 한술 더 떠서 대답했다.


“그러지 마. 미래로 빨리 갈 뻔하다가 되돌아온 차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상춘(賞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