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출근하기 전, 영등포에서 새벽 운동을 하려고 집을 나섰다. 집 앞 승용차에 시동을 걸기 위해 다가갔을 때,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허리를 숙여 자세히 살펴보니, 차량의 왼쪽 펜더부터 앞뒤 문, 뒤 펜더까지 날카로운 스크래치가 깊게 나 있었다. 마치 상어의 옆구리를 칼질하여 하얀 속살이 드러난 것처럼 보였다. 두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짓을 한 거지?’
주변 차량을 둘러봤지만, 내 차만 손상되어 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짓이라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주차된 곳은 다세대 주택 담장 옆이었다. 그 집 반지하에 사는 사람이나 근처 주민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블랙박스가 없던 시절이라 범인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당시에는 아침에 공회전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부분 차량이 카뷰레터 방식의 기화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추운 날씨에는 공회전을 해야 RPM이 정상적으로 떨어졌다.
만약 불만이 있다면 미리 쪽지를 남기거나, 사전에 알릴 방법도 있었을 텐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남의 차량을 훼손하는 대담함에 기가 찼다. 방범등 아래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그날따라 방범등이 더욱 초라해 보였다.
의식주가 아니라 의식거주(衣食車住)라는 신조어가 뜨던 시절이었다. 나의 첫 애마인 프라이드는 소하리 출하장에서 직접 인계받은 차량으로, 신생아를 보듬은 마음이었다. 승차한 후, 새 차 특유의 냄새는 또 어떻던가!
이태리제 쌍 클랙슨 장착부터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사이클론, 선팅, 핸들과 시트 커버, 심지어 룸램프와 핸들은 콩코드의 것으로 교체하기도 했다. 일요일마다 직접 세차를 하고, 한 달에 두어 번 정도는 왁스 칠을 하며 애지중지 관리해 왔다. 그런 차가 이른 새벽에 처참히 난도질을 당했으니, 그 충격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음날, 나는 상도동에 있는 작은아버지의 빈 차고에 차를 집어넣었다. 등 뒤로 들리는 작은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주차했던 자리를 내려다보니,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편리함 이면의 불편함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주차 문제로 서로 반목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화풀이를 하는 이웃이 그토록 싫었다.
다른 하나는 아직 전세를 살고 있는 평사원인 내가 자가용을 가진다는 것이 과분한 일이라는 자성이었다. 몇 달 후 아파트로 이사 가기 전까지는 차를 타지 않기로 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서점에서 ‘선의 황금시대’와 ‘명상 비법’이라는 책을 사서 읽으며, 출퇴근 시간을 알차게 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의도에서 철산동을 오가는 시간은 더 짧아졌고, 주차 시비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일주일이 지나자, 처음의 결심과는 달리 마음속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회사 동료들이 차를 어떻게 했냐고 물어볼 때마다 답변하기가 궁색했고, 운행을 하지 않아도 자동차세와 보험료는 꼬박꼬박 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차는 소모품이기 때문에 흠집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서서히 누그러졌다.
보름쯤 지난 후, 나는 차를 다시 끌고 나와 동네 카센터에 맡겼다. 실낱같은 흔적만 보일 뿐, 깨끗하게 수리가 되어 있었다. 그날 이후로는 승용차를 새로 구입하더라도 일체의 액세서리를 달지 않았다. 차의 정비 이력이나 부품 교환 시기 등은 꼼꼼히 챙기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세차 좀 하라는 아내의 잔소리도 듣지만, 서너 번 미루다가 한다.
요즘도 차를 주차할 때, 대충 세워두고 가지 않는다. 주차선을 제대로 지켰는지, 전후좌우 다른 차에 방해가 되지 않는지를 살핀다. 남들은 나더러 꼼꼼하다고 하지만, 그건 과거에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얻은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