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어머님이 뇌종양 수술을 받고 본가로 내려가실 때, 아버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서울에서 내가 대학 4년 동안 자취 생활을 했는데, 살림을 왜 못하겠느냐?”
한 번씩 고향에 가보면, 아버님은 취사, 장보기, 빨래까지 혼자서 다 해내셨다. 어머님과 함께 운동장에 나가 걷기 운동도 하셨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 어머님만 혼자 집에 남겨두고, 아버님은 복지관, 한시 모임, 서예학원 등 외부 활동을 즐기셨다. 어머님은 수술 후 회복이 더뎌서 집안일은 할 엄두도 못 내셨는데, 아버님은 그런 상황을 외면한 채 밖으로만 나가셨다.
하지만 아버님의 노력은 2년 반 만에 한계에 다다랐다. 팔순을 맞이하신 아버님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었다. 정밀 검진한 결과, 파킨슨 초기 단계 의심과 지주막 낭종 소견까지 나왔다.
한 달 반마다 올라오셔서 파킨슨 진료와 처방을 받으셨다. 자신의 건강마저 위태로운 상태에서, 버거운 짐은 끝내 내려놓지 않으셨다. 그러나 의지만으로 한계가 있었다. 아버님의 굳건했던 초심이 서서히 침식되는 것을 우리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형제들과 상의 끝에 우리 내외가 본가에서 부모님을 모시기로 했다. 연말 무렵 아내가 먼저 내려가고, 일 년 뒤 나도 하던 일을 정리하고 귀향을 했다. 돌이켜보면 부모님과 함께한 5년 남짓한 세월은 우리 부부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평생 잊지 못할 동행이었다.
아내가 시장을 보러 나가면, 아버님은 몇 번이나 따라 나오셨다고 했다. 상인들에게 “우리 며느리가 객지에서 왔네.”라며 자랑하신다고 들었을 때, 그간의 마음고생이 떠오르며 나는 숙연해졌다.
어머님은 뇌수술 후유증으로 인해 치매가 진행되었지만, 그 후 아버님마저 그렇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아버님은 40여 년간 교편을 잡았고, 퇴임 후에도 문집 발간, 지역신문 고정 칼럼니스트 등 꾸준한 사회 활동을 하셨다. 가까이서 하루 일과를 지켜보니, 이른 새벽 조깅, 아침 식사 후 일기 작성, 독서, 서예 등 연세를 의심할 정도로 정정하셨다.
그러나 아버님에게도 치매가 찾아왔다. 이 질병은 외부 환경에서도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두 가지 요인을 꼽을 수 있었다.
첫째, 스트레스였다. 치매로 진행 중인 어머님을 3년 남짓 혼자서 수발하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신 것이, 큰 부담이 되었을 것 같았다. 그 무렵, 숙부님에게 실토한 속내가 이를 뒷받침했다.
“ 말년이 이렇게 불운할 줄 몰랐네..”
둘째, 교통사고 전력이었다. 50대 초반, 오토바이 사고로 두부에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것이 지주막 낭종의 원인일 가능성이 있었다.
부모님은 만년에도 꼭 한 방에서 주무셨다. 아버님이 경도인지장애를 보일 때, 주위에서는 잠자리만큼이라도 떼 놓으라고 했지만, 아버님은 완고하셨다.
어느 날 아침, 아버님은 어머니가 이상하다고 우리를 부르셨다. 119를 불러 응급실에 가니, 흡인성 폐렴이라고 했다. 지방병원에서는 치료가 어려워 진주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급히 이송하였다. 상당 기간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
그 이후 아버님은 증상은 눈에 띄게 심해졌다. 잠자리에 어머님이 없으니, 우리가 살았던 집에 온 것으로 착각하는 섬망 증세가 나타났다. 낮에 배회하는 거리는 길어지고 빈도는 잦아졌다. 위치추적기는 자주 말썽을 부렸고, 교통사고 직전까지 간 아찔한 상황도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밤에 잠을 제대로 주무시지 않는 것이었다. 새벽에 혼자 일어나서 집안을 돌아다니는 바람에, 큰방과 화장실, 주방 외에는 모든 문을 걸어 잠갔다. 서랍을 뒤지거나 마당에서 무언가를 자주 태우는 일도 잦았다. 급기야 부근 가게에 자주 들어가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핀잔을 듣기도 했다. 아는 이웃이 우리에게 어렵게 말을 붙여왔다.
“그만 요양원에 모시지, 누구는 좋아서 모십니까?”
하지만, 우리 부모님이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부모님과의 마지막 동행을 위해 우리 내외는 본가에 오지 않았던가! 단순한 책임감을 넘어 보은과 성찰의 시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