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 포구에 서서
남해로 들어가는 길은 남해대교와 노량대교 두 갈래가 있다. 운전 일정에 여유가 있을 때는 일부러 남해대교를 지나게 된다. 반세기 넘게 그 자리를 지켜온 다리를 건널 때면 경건한 마음이 들어, 천천히 운전하게 된다.
어느 날, 노량대교를 지나며 남해대교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작아 보여, 마치 미니어처 소품 같았다. 내 눈에도 이렇게 왜소해 보이는데, 처음 찾은 외지인들의 눈에는 얼마나 초라하게 보일까 싶었다.
1960년대, 남해군의 상주인구는 12만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섬이라는 한계 때문에 경제, 교육, 의료 등 여러 분야에서 낙후성을 면치 못했다. 육지와 연결되는 유일한 길은 여객선을 통한 바닷길뿐이었다.
어릴 적. 부산행 배를 타고 견내량을 지날 때면, 거제대교 공사 현장에서 솟아오르는 교각을 부러움 섞인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노량 포구에 다리를 건설하는 것은 남해군민의 오랜 염원이자 숙원사업이었다.
하지만 노량해협은 견내량과는 달랐다. 수심은 최고 36m로 깊었고, 시속 7노트의 해류가 흐르는 험지였다. 해상 구조물을 세우기에 적합하지 않을뿐더러, 당시에도 350t급 여수–부산 간 여객선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앞으로 더 큰 배들이 드나들 것을 고려한다면 현수교 외에는 마땅한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국내에는 장대교(長大橋) 건설 경험이 전무했다. 시공사인 현대건설(주)로서는 일본 기술진의 도움이 불가피했다. 일본에서의 풍하중 실험을 통한 구조 안전도 검증, 앵커리지 위치 자문, 자재 수입을 위한 대일 치관 등 국내외를 넘나드는 거대한 공사였다.
1968년 5월, 교각 공사를 시작하여 5년이 지난 1973년 6월, 남해대교가 준공되었다. 두 개의 붉은 주탑에 칼날처럼 걸쳐진 상판. 그 아래 푸른 노량해협을 하얗게 가르며 질주하는 하이드로포일 엔젤호!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랜드마크였다. 누군가는 ‘한국의 나폴리’라며 부르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개통 당일, 전국에서 10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다리는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일본 기술자들은 다리 붕괴를 우려해 사색이 되었고, 끝내 울음을 터뜨린 이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금산, 보리암, 상주 해수욕장, 등 천혜의 자연경관은 빠르게 입소문을 탔고, 같은 해 11월 남해안 고속도로까지 개통되자 매년 5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았다. 신혼여행, 수학여행은 물론 각종 단체 여행지로 최고의 인기 장소였다. ‘사진’이라는 노란 완장을 찬 사진사들이 다리 위를 누비며 관광객의 웃음과 포즈를 채집했다. 사진사 등록제, 주소 우편 발송 서비스까지, 다리 하나가 지역 문화를 새로 짜놓았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오랜 세월을 견뎌온 남해대교는 이제 노후화가 많이 진행되었다. 2018년 9월 개통된 대체 교량인 노량대교에 국도 19호선의 지위를 넘겨주면서, 이제는 지방 도로명 하나 붙지 않은 다리로 남았다. ‘동양에서 가장 긴 현수교’라는 수식어는 이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현수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무현 교수의 『축적의 시간』에 따르면, 우리 기술로 개념 설계부터 완공까지 온전히 수행한 첫 장대교는 2012년 준공된 이순신대교다. 여수와 광양만을 잇는 이 현수교는 ‘DL이엔씨’가 시공했다.
기술의 흐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 회사가 최근, 세계 최장 현수교인 터키 ‘차나칼레 대교’를 건설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일본의 기술을 배우며 남해대교를 건설한 지 39년 만에 이순신대교를 완공했고, 그로부터 10년 만에 세계 1위의 교량을 만든 것이다. 노량대교 또한 우리 기술로 지어진 현수교다.
이제 남해대교는 시대에 뒤처진 다리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 시절 열악한 토목 건설 환경 속에서도 정책 입안자, 기술자, 현장 노동자들의 흘린 피와 땀, 그리고 뚝심 덕분에 가능했던 기적. 남해대교야말로 세계 1위 기술의 시발점이자 소중한 디딤돌이었다.
지금 노량해전 전장(戰場) 위에 굳건히 주탑을 세운 세 개의 다리, 남해대교, 노량대교, 이순신대교는 모두 다른 시대의 기술이지만 그 중심엔 늘 사람이 있었다. 이 장대한 다리들을 내려다보는 충무공의 마음은 과연 어떠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