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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운 Sep 25. 2021

나비야 청산 가자

아버지를 추모하며

 갑자기 때 아닌 장대비가 세차게 내리친다. 길바닥에 새하얀 물보라로 튀어 오른다. 산으로 에워싸인 추모누리 화장장에 우우 소리를 질러대며 비가 쏟아져 내린다. 금방이라도 천둥과 벼락이 내리칠 기세였다. 나는 앉으면 못 일어날까봐 힘들면 선채로 벽에 기댔다. 이따금 어깨와 팔이 가늘게 떨려왔다. 며칠간 감정의 너울이 너무 커 이성적으로 제어할 수 없었다. 내심 천둥 벼락이 기다려졌다.   

 상복을 입든 안 입든 현관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걱정 어린 얼굴이다.  다시 한 번 장지에 나가있는 업자에게 나는 준비사항을 확인했다.


여기 지명이 연죽(煙竹)이다. 담뱃대(연죽)에서 다 탄 재는 별다른 의미 없이 툭툭 털어버린다. 그러나 이 화장장에 오는 이들의 탄 재는 그렇게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가령 아버지 같은 분은 일생을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던가.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서울에서 동생 내외가 온다고 하여 병실에서 기다렸다. 오늘로 폐렴 치료 3일째다. 항생제가 그런대로 듣고 가래 끓는 것도 차도가 있어 큰 고비를 넘긴 듯 했다. 동생 내외를 보며 대화를 나누듯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반대편에 있던 내가 부르자 고개를 돌려 보기도 했다. 올 추석을 넘겨 내년 구순까지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단단한 둔기로 뒷머리를 맞은 듯 했다. 잠이 깬 김에 화장실에 가려 일어서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055-8xx-xxxx? 모르는 번호였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해? 그래도 받아 보자. 나지막하지만 초조하게 들리는 간호사 목소리였다.

9월 1일 새벽 3시 28분

“...할아버지 지금 상태가 많이 안 좋거든요. 혈압도 떨어지고. 산소 포화도도 30대 정도로 떨어지고 있고. 와보셔야 될 것 같네요.”    

 그럴 리가 없다! 어제 동생이 왔을 때만 하더라도 좋지 않았던가. 나는 아내를 깨우고  먼저 집을 나섰다. 바쁜 걸음으로 10여 분 거리다. 병원이 보이는 거리까지 왔다. 휴대폰이 또 울렸다.

3시 41분

“아버님이 지금 임종 직전 같거든요. 조금 있으면 돌아가실 것 같아요!”    


 뛰어서 병실에 들어섰다. 6인실 가운데쯤 자리한 아버지 병상. 평소와 달리 양옆으로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눈 감고 있는 아버지. 비강 캐뉼라 대신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침대 옆 이동식 모니터. 심전도, 심박수, 산소 포화도, 맥박, 호흡계수 지금까지 보아왔던 데이터가 아니다. 어떻게 이를 수가.. 아내가 뒤따라 들어오자 간호사가 설명을 한다.

“수치가 너무나 빨리 떨어지고 있습니다.”

아내가 다급히 묻는다.

“지금 바로 혈압 상승제를 쓰면 안돼요?”

“이렇게 떨어진 상태에선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 왼손을 잡았다. 아직은 따뜻했다. 굳었던 뼈마디가 풀렸을 뿐, 이마에  높은 열은 없다.

“아까 석션(suction)하며 이상해서 눈꺼풀을 올려보니..”

 침착하자. 손을 붙잡고 또 한손으로 손등을 쓰다듬었다. 조금 후 수축기 혈압이 40대에서 30, 20으로 급격히 떨어지자 아내가 흐느낀다.

“아버지, 우리 아버지가 진짜 가시는 것 같네. 어떻게 해!”


 나는 손으로 왼팔 윗부분을 가볍게 두드리며 아버지를 불렀다. 다 가라앉은 데이터가 가볍게 출렁인다. 얼굴을 잠깐 찌푸렸다가 이내 평온을 되찾는다. 편히 가시게 손을 뗐다, 새벽 4시 정각 무렵. 형제들에게 카톡 했다.    

‘타계.. 하셨습니다...’


 울음이 나오려다 목에 걸리고 만다. 주위 노인들도 힘겨운 노구를 붙든 채 잠을 자고 있다. 가시는 길 두렵지 않게 나는 끝까지 왼손을 붙잡고 있었다. 마지막 온기가 내 손안에서 가물가물 거렸다. 응급실 담당의가 다가와 선고를 내린다. 앞 커튼마저 가려지고 간호사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굴절된다.   

  

 앞으로 전개될 일들이 눈앞에 또렷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평소 대비했던 데로 하자. 어머님이 마련해 놓은 수의를 사용한다. 가급적 조화는 받지 않는다. 형제들 앞으로 온 조의금은 다 돌려주자. 아버님이 장제비 일부를 내고 친인척과 우리 내외 앞으로 들어온 조의금으로 충당한다. 노제는 지내지 않는다. 장지는 문중이 아닌 가족묘원이다. 복도에 나온 나는 부르르 몸을 떨다가도 이내 무덤덤해지는 등 감정을 종잡을 수 없었다.  

    

 장례 3일 동안 비가 오락가락 궂은 날씨 연속이었다. 발인 전날이 월요일이라서 조문객 수를 염려했다. 둘째와 막내 동생의 직장인들이 대거 문상하여 우려를 불식시켰다. 장례식 이튿날 저녁 몸이 무거웠다. 나는 동생에게 농담을 던졌다.    

‘어제(8/31) 살가운 셋째 내외도 봤으니 이제 더는 이 세상에 여한이 없다. 그래도 하루 더 있다가 온다(9/2)는 큰 아들까지 보고 갈까? 가만 있어보자.. 막내가 오늘(9/1) 오후 3시경에 유럽으로 학회 모임에 간다고 했지? 큰아들 보려고 하루를 더 지체하다보면 우리 막내는 뒷구멍으로 빠져 나갈 것이고..외국에 나가 있는 애가 부고한다고 하루 만에 들어와? 안되겠다. 여기서 이만 내려놓자.’


 그랬다. 할아버지가 임종하실 때 부모님은 동남아시아 여행 중이었다. 자정을 가까스로 넘겨 돌아가시는 덕(?)에 어렵사리 입관을 지켜볼 수 있었다. 사대를 졸업 후 첫 임용지가 삼천포라는 도회지였다. 큰집에서 분가하여 비로소 신접살림을 차린 곳이다. 셋째를 출산하여 부모님이 애지중지 키웠다. 그 바람에 나는 외가를 전전해야 했다. 두 살 터울이다.     

          

 문상객이 뜸한 사이 나는 영정을 올려다봤다. 아버지의 형형한 눈초리와 당당한 기백에 한없는 존경심이 우러났다.

 ‘중도지폐(中途之廢)해서는 안 된다. 결과는 천명에 맡겨야 한다. 일정지심(一定之心)으로 출발과 끝이 같아야 한다.’

 증조할아버지의 생활 철학을 충실히 따르고자 했던 분. 독자이신 할아버지와는 달리 증조할아버지는 6형제 중 3남이었다. 일은 할 줄 몰라도 한학은 늘 가까이 했다. 추운 겨울날 어린 아버지를 요에 싸안고 서당에 데려간 사람도 증조할아버지였다. 예의범절을 중히 여겨 집 안팎에서 해야 할 행동과 처신을 가르쳤다. 종이쪽지 하나, 밥풀 하나 함부로 버리지 못하도록 했다. 아버님의 생활은 늘 검소했고 돈을 아껴서 저축을 했다. 상다리가 부러지면 고쳐서 썼고, 반찬은 서너 가지가 넘지 않았다. 꼭 필요한 물품은 현금으로 사지 할부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육신을 저토록 뼈만 남을 때까지 버리지 못한 것인지 모른다.   

 

어느 노스님이 TV에서 대담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정신과 육신은 서로를 양생시키지만 어느 한계점에 이르면 육신이 정신을 옭아맨다. 그땐 과감히 법구(法具)를 버려야 한다.”

법정 스님은 말했다.

“머물면 추해질 뿐.. 수행자는 늘 틀을 깨야 한다.”

퇴계 이황선생도 칠십 생을 마감하며 명문(銘文) 마지막 구절에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조화를 타고 돌아가니, 다시 또 무엇을 구하리오(乘化歸盡 復何求兮)’


 화장이 끝나자 화로에서 나왔다. 담담하게 받아들었다. 얼이 떠나버린 빈집. 타고 무너져 내린 허망함이 감돌고 있었다. 수골(收骨)하는 과정에서 좌측 고관절 부위에 금속 핀이 보였다. 고관절 골절 후 아버님은 그래도 만 3년을 사셨다.

   

 화장장을 뒤로하고 장지로 갈 무렵 빗줄기가 보슬비로 변했다. 1년 전 장인어른이 돌아갔을 때도 그랬듯이 아버님도 내가 선도 차량으로 길을 놓아드렸다. 이어리 마을을 돌아서자 구름이 녹두산 정상부만 남겨두고 산 아래 가득하다. 멀리서 우리 행렬을 지켜보고 있다. 가청고개를 넘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그사이 구름이 떠올라 장지 마련된 곳이 선연히 보이고, 더 위로는 비구름이 자욱하여 천지 구별이 묘연했다. 이렇게 절묘할 수가!     

 장지로 들어가는 옆 밭에 돼지감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풀줄기를 헤치고 들어서자 무수히 많은 나비가 날아올라 옷자락에 앉기도 한다.     


나비야 청산 가자.    

              -청구영언   

나비야 청산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청산으로 가는 영령들이니 놀라지 마라. 이 중에 너 애비도 있느니라.’

 오랜만에 할아버지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안장 행사가 잘 끝나기를 바라듯 비구름이 머무적거리며 지켜본다. 하관 때 나는 말했다.

“아버님이 몸소 묻히기를 바라던 자리입니다. 이제 그 약속을 받들어 모십니다. 오랜 병석에 너무 힘드셨죠. 이제 평안하게 계십시오.”

그제야 목을 놓았다.     


구름으로 잠긴 녹두산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물었다.

‘아버지, 이제 어디 계십니까?’

‘소이부답 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이네!’

 한마디 남기시고

 구름 속으로 표표히 사라지는 아버님 뒷모습이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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