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극장으로의 초대

by 소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OO면민 여러분,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숙제를 하고 있던 나는 귀가 쫑긋해졌다.


“여기는 서울 화성 영화사 순회 선전부입니다. 이번에 여러분을 모실 영화,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우~와, 왔다 왔어!!”


나는 방에서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숙제하다 말고 어딜 가?”

어머니의 질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가설극장 쪽으로 달려갔다. 공터였던 자리에 나무 기둥들이 여기저기 박혀있고, 가림막을 매다는 설치 작업이 한창이었다. 상영할 영화 포스터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많아야 예닐곱 편 정도였지만, 나는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다. 꼭 봐야겠다는 영화 한두 편을 골랐다.

아버지는 매우 엄했다. 저녁 식사 후 집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조차 엄격히 통제했다.


‘내가 뭐 여잔가..’

평소 나의 불만이었다. 두 살 아래인 남동생은 큰방을 자유자재로 드나들었기에, 나는 동생을 포섭해 아버님의 마음을 흔들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내 간절한 노력에도 결과는 늘 신통치 않았다. 영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동생에게 그런 나의 애원이 통할 리 없었다.

차선책은 어머니의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다만 우리 가게 유리창에 영화 포스터가 붙어야만 했다. 상영 날짜에 해당 포스터 하단을 떼어 가면 무료 관람의 특혜가 주어졌다. 나는 어머님이 포스터는 곧 무료 티켓이라는 등식을 잊지 않도록 여러 번 말씀드렸다. 그런 진지한 전략은 그나마 성과가 있었다.

전기도 안 들어오던 시골 동네. 극장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크게 들려오는 발전기 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표주박처럼 매달린 백열전구들 덕분에 극장 주변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 불빛 아래 하루살이들만 몰린 것이 아니었다. 식사 후 바람을 쐬려 나온 동네 어르신들, 우리 또래의 개구쟁이들, 그리고 동네 형들이 함께 붐볐다.

그때 나는 ‘선택받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았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개찰할 때의 그 뿌듯함!

극장 안은 돌멩이들이 여기저기 드러난 흙바닥이었다. 앞쪽에는 어린아이들이 집에서 가져온 비료 포대나 볏짚 등을 깔고 앉았다. 그 뒤로 조금 키 큰 아이들은 편편한 돌을 깔고 앉거나 그냥 쪼그리고 앉아서 영화를 봤다. 영화는 저녁 식사 후 한두 시간 지나서 단 한 편만 상영되었다. 중간에 파묻혀 보던 나는 고약한 냄새에 시달리곤 했다. 소리 없는 놈이 더 독하다.

영화에 몰입하다 보면, 때때로 장막 뒤에서 돌아가던 발전기가 꺼지기도 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들고, 숨죽였던 별들도 우두둑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상영하던 날은 대개 그믐이나 초승달이 얼굴을 내밀던 때였다.

“우~~!”

야유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발전기는 잘 돌아가는데 영상이 나오지 않거나, 영상은 문제없지만 소리가 안 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두 번째 경우처럼 무성 영화가 되면 관객들의 조급함은 극에 달한다.

“에라~이, ○○야!”

스크린 바로 위에 매달려있는 스피커를 향해 한두 명이 돌 팔매질을 했다. 추석맞이 마을 석사 대회도 아닌데, 시간이 흐를수록 돌멩이들이 심상찮게 날아다닌다. 스피커는 이미 형색이 말이 아닌 상태였다. 다른 동네에서 여러 차례 봉변을 겪은 탓인지, 넉살 좋은 사장은 한풀이 재물로 그냥 방치해 두고 있었다.

가림막 아랫단이 들썩이며 아이들 한두 명이 관객 속으로 파고들기도 했다. 얼마 후 그들은 극장 관계자에 의해 토끼 목덜미 낚아채듯 쫓겨났다. 가까스로 발각되지 않는 행운아도 더러 있었다.

“저기 있는 저 아이요.”


야박하게 고자질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눈에 봐도 누구네 아이고, 삼밭 집 형제이거나 다리 건너 김 아무개 애들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마적, 빨간 마후라, 김진규, 최은희의 벙어리 삼룡이, 지옥문, 불가사리, 도금봉의 목 없는 미녀, 달기 그리고 사자성 등등. 이제는 영화마다 줄거리를 다 기억하지 못한다. 그때의 빛바랜 장면들이 불특정하게 기억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다.

영화가 거의 끝날 무렵이면, 관계자들이 가림막을 장대 위로 서서히 접어 올린다. 봇물 터지듯 극장을 빠져나오는 관객들. 한적하던 시골 밤길이 시끌벅적해진다.

가설극장의 영사기는 꺼졌지만, 내 영사기는 다시 돌기 시작한다. 배우들의 액션, 화려한 의상, 가슴 저리게 하는 애틋한 사연들..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잠자리에 들어도 천정에 영상들이 맴돌아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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