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이야기보따리를 구수하게 풀어놓는다.’
하지만 우리 할머니는 이야기는커녕 집안일로 늘 바쁜 분이었다. 한가한 시간이 생기면 모시 틀을 앞에 놓고 모시라도 삼으셨다.
큰집에서 제사가 있던 날, 우리 3형제와 사촌들은 큰방의 할아버지 곁으로 모였다. 긴 담뱃대를 입에 물고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자주 옛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야기 하나 해줄게 들어봐라.”
늘 이렇게 운을 떼시곤 했다.
“옛날에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고 있었단다. 산길을 넘어가다 보니 그만 해가 지고 말았네. 금방 깜깜해지는데 길은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산짐승 울음소리는 들려오지 않나, 그 참! 낭패라.. ”
우리는 서로 숨소리조차 죽여 가며 귀를 쫑긋 세웠다.
“아! 그런데 저~어 멀리 희미한 불빛 같은 것이 보이더란 말이다.”
할아버지가 담뱃대로 가리킨 곳은, 창호지 문 가운데 조그맣게 난 유리창이었다. 밤이 깊어 바깥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우리는 귀신 집이거나 호랑이 눈을 떠올리며 한 발 앞서갔다.
나그네는 소복 차림의 여인에게 간청하여 아랫방에서 겨우 잘 수 있었다. 불을 끄고 누웠지만 발을 바로 뻗을 수가 없었다. 일어나 펼쳐져 있던 병풍을 옆으로 치운 순간, 갑자기 시커먼 물체가 방 가운데로 넘어졌다.
“나무 궤짝인가? 가만있어 보자.., 뚜껑이 조금 열려있네?”
“한 손을 넣어서 더듬어보니 아이고야! 이게 송장이 아니야!”
“으악!”
우리는 움찔 놀라며 손을 양다리 사이에 집어넣거나, 소매 속에 넣어 소름을 쓸어내렸다. 다시 할아버지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담뱃대를 입에서 떼시더니 가쁜 기침을 연거푸 하셨다.
올망졸망 앉은 우리들은 불편한 다리를 고쳐 앉거나, 엎드려 턱을 괴기도 했다. 기침이 빨리 멎기만을 기다렸다.
“그 여자는 죽은 지아비의 염습까지는 했지만, 여자 힘으로 하관을 못해 고민하고 있었단다.”
“깜깜한 밤, 송장을 지게에 짊어지고 집을 나오긴 했는데, 낭패라 말이다. 산짐승은 여기저기 울어대지를 않나, 송장은 벌떡 일어날 것 같고..”
할아버지는 수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부리부리한 눈으로 우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물으셨다.
“너희들 같으면 어떻게 할래?”
“소복 입은 아줌마랑 같이 가서 묻으면 되잖아요.”
“예끼, 이놈들아, 생판 모르는 남녀가 밤중에 가길 어디를 가.”
“가만히 생각을 해봤어. 자기 부모도 아닌데, ‘에라 모르겠다.’하고 집을 조금 벗어나자, 땅에 묻었단다.”
집으로 허겁지겁 내려오자, 소복 입은 여인이 수고했다며 냉수를 내놓았다. 이제 자신은 의지할 때가 없으니, 한양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식은땀 흘리던 나그네는 한 귀로 흘려듣고 아랫방으로 내려갔다.
“송장 있던 방에 들어왔는데, 잠이 오겠냐? 대충 묻은 게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동이 트자마자 줄행랑을 쳤네. 그런데 뭐가 이상한 거야! 뒤를 돌아봤더니, 아이고야! 집이 불타고 있단 말이다.”
“네에?”
“불티가 사납게 날리는 지붕 위를 보니, 소복 입은 여자가 손을 흔들며 서 있더란다! 치맛자락에는 이미 불이 붙어 있었고. 그것 참!”
할아버지는 담뱃재를 재떨이에 탁탁 치시더니, 일어설 준비를 하셨다. 눈치 없는 사촌 동생이 그다음은 어떻게 됐냐고 묻고, 우리는 하나 더 해달라고 졸랐다.
“어허! 이 녀석들.., 이제 너희들끼리 놀아라.”
할아버지는 뒷짐을 지고 제사 준비를 보려 방을 나섰다.
그때 우리들끼리 짐작했던 것은, 그 여자의 순애보 이야기였다. 나그네에게 의탁하려 했으나 거절을 당한 후, 방화로 남편 뒤를 따라갔다는 이야기였지만, 출전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