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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운 Aug 31. 2022

남해 대교

노량 포구에 서서

 남해로 들어오기 위해선 남해대교나 노량대교를 건너야 한다. 나는 오랜 시간 운전을 하지 않는 한, 되돌아올 때 남해대교를 애용하는 편이다. 반백년을 무던히 견뎌 온 다리다. 경건한 마음이 절로 일지만 옛 추억을 회상하며 가급적 천천히 건넌다.

     

 너무 편애(?)한다는 생각이 들어 얼마 전 노량대교도 건너 봤다. 남해대교를 차창 밖으로 내려다보니 너무 왜소하고 심지어 미니츄어 소품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내 눈에 이러하니 외지인들에게는 과연 어떻게 보일까.

     

 1960년대 남해군 상주인구는 12만여 명에 이르렀다. 도서지방이라는 지리적 한계로 경제, 교육, 의료 등 여러 부문에 있어 낙후성을 면치 못했다. 도시와의 주요 교통수단은 바닷길 여객선이었다.

 내가 탄 배가 부산 방향 견내량을 지날 때, 여러 교각들이 세워져 있는 거제대교 공사현장을 보면서 한없이 부러워하던 때가 있었다. 노량 포구에 다리 건설은 남해군민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노량해협은 견내량과 달리 최고 수심 36m에 시속 7노트의 급속한 해류가 흐르는 곳이다. 해상구조물을 세우기 힘든 지형일뿐더러, 350t급 여수부산 간 여객선의 수로이기도 했다. 향후 더 큰 배가 드나들 것을 감안하다면 현수교 말고는 마땅한 대안이 없었던 것 같다.

     

 대형 프로젝트를 시행함에 있어 국내에서는 장대교(長大橋)의 축적된 경험이 없었다. 그리하여 시공사 현대건설()로서는 일본 기술진들의 도움이 불가피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 지역구 국회의원이 어느 종합일간지에 기고했던 기사가 있다. 그 내용에서 건설사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건설부에서 일본 교량 전문가들을 국내로 초청했다. 남해 쪽 앵커리지 설치는 그분들의 자문을 구해 현재의 위치를 확정할 수 있었다. 또한 일본 기술진들이 일본에서 교량 모형으로 풍하중 실험까지 거쳐 안전도를 확보했다. 공사 자재 도입을 위해 대일 차관 협정도 필요했으며..

     

 19685월 교각 공사부터 착공하여 만 5년이 지난 19736월에 남해대교가 준공됐다. 두 개의 붉은 주탑을 거치대 삼아 칼날처럼 예리하게 놓인 상판. 그 아래 푸르디푸른 노량해협을 하얗게 속살 자르며 질주하는 하이드로포일 엔젤호!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랜드마크였다. 어떤 이는 한국의 나폴리라며 상찬 하였다. 

     

 일반인들에게 개통되던 날, 전국에서 10만 인파가 모여들어 대교는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일본 기술자들이 붕괴 우려에 사색이 되고, 울음까지 터뜨리는 이도 있었다 했다.

     

 금산, 보리암, 상주해수욕장, 다도해 등 천혜의 자연경관이 입소문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대교가 개통되던 그 해 11, 남해안 고속도로까지 개통하면서 매년 50만 명 이상이 찾아드는 관광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신혼, 수학여행은 물론 계모임 등에 있어 최애 명소였다. ‘사진이라는 노란 완장을 찬 사진사들이 등록되어 활동했으며, 선불에 알려 준 주소지로 우편 발송하기도 했다.   

 

 바닷바람 맞으며 어지간히 오랜 세월을 견뎌온 남해대교. 이젠 노후화가 많이 진행되어 20189월 개통된 대체교량(노량대교)19번 국도의 지위를 넘겨줬다. 지방 도로명마저 없는 대교이니, 어떻게 보면 다리로서의 명운을 다한 게 아니겠는가. 동양에서 가장 긴 현수교라는 수식어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현수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나라 장대교 건설 역사 상, 개념 설계까지 온전히 자립 기술로 건설한 다리는 이순신대교라고 한다(축적의 시간고무현 교수). 여수시와 광양만을 잇는 현수교로 시공사인 ‘DL이엔씨’가 2012년에 완공하였다.

     

 이 회사가 올해 3, 세계 최장 현수교인 터키의 차나칼레 대교를 건설했다는 기사를 봤다. 일본에 한수 배우며 남해대교를 건설한 후 39년 만에 이순신대교, 이어 10년 후 세계 1위의 현수교를 국내 기술로 이룩한 쾌거다. 남해대교 옆 노량대교 또한 국내 기술로 건설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남해대교, 속된 말로 한물간 교량 정도로 폄하할지 모른다.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1968~1973년 척박했던 토목건설 여건에서 정책 입안, 기술, 건설 노동자들의 피와 땀, 뚝심으로 일궈낸 남해대교. 세계 1위의 시발점이자 디딤돌이었음을.

     

 남해대교를 필두로 노량해전 전장(戰場)에 굳건히 주탑을 내린 것이 있으니 노량대교, 이순신대교다. 남해충렬사에서 내려다볼 성웅의 내심은 어떠할까.


사진 출처 : 素雲 Photo fol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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