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를 챙겨 노량에 있는 남해 충렬사로 향했다. 해안가 언덕배기 밑에 차를 세웠다.
이 자리엔 한때 충렬사로 오르는 돌계단이 있었다. 한 여름 이때쯤이면 녹음이 우거져 계단 하단부만 자태를 드러내곤 했다.
그것을 보며 예찬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느 여인네의 녹색 치맛자락 아래, 살포시 내민 외씨 버선발이 이와 같으려니..’ 지금은 다 치워지고 어느 군수의 공적비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수년 전 충렬사 성역화 사업 때, 우회하여 남쪽 방향에서 충렬사 외삼문으로 진입토록 바꿨다.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 34년째 되던 해(1632/문화재청 홈피), 지역 선비들이 나서서 초가 사당(草舍)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이후 인근 암자에서 승장 1명과 승려 10명이 교대로 사당을 지켰다고 전한다.
남해 충렬사가 향하고 있는 곳이 남해대교 건너편이다. 갈사만, 광양만 그리고 관음포 해역 즉,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곳임을 알 수 있다.
경내에서 보니 잘 안보였다. 잡목만이라도 전지 하면 시야를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중일의 역학관계가 예나 지금이나 녹록하지 않음은 주지의 사실이 아닌가.
충무공의 시야를 차폐가 아닌 개방함으로써, 장엄한 서사가 이어져야 한다. 역사란 쉼이 없기 때문이다.
외삼문 계단을 거의 내려오니 오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예전 돌계단의 상단부임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가파른 계단이지만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아름드리 팽나무 군락이 장관이었다. 갯마을에서 흔하게 보는 포구나무(팽나무)지만 그처럼 우람한 것들은 드물었다. 중턱에 걸터앉아 땀을 훔쳐가며, 남해대교의 날렵한 상판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기만 했다. 호들갑을 떠는 매미 소리에 나도 발길을 재촉한다.
바닷바람을 쐬며 해안도로를 따라 걸었다. 노량도 견내량, 명량처럼 다리 량(梁)을 쓴다. 견내량(見乃梁)은 통제영 관원들이 통행자를 단속하면서, 명량(鳴梁)은 물살이 빠르고 우는 듯 요란스러워서, 그런데 노량(露梁), 이슬 다리라니? 무지개라면 몰라도 이슬과 다리 사이에 어떤 은유가 숨어 있을까.
인터넷에 여러 설이 나돈다. 남해군 공식 블로그에서의 설명이 그나마 참조할 만했다. ‘남해로 유배 오는 사람들의 눈에 나룻배 부딪히는 물방울이 마치 이슬방울처럼 보였다.’
아마도 노량은 유배객들의 자조적인 심사를 드러낸 포구 이름이 아닐까. 이슬은 본디 햇볕이 들면 소멸되는 한시적인 것이다. 해배가 멀지 않으리라는 믿음은 이처럼 부질없으니, 멀어져 가는 뭍과 짓궂은 창파가 한스러웠을 것이다.
평소 낚시꾼으로 붐비던 방파제도 워낙 폭염이다 보니 얼씬도 안 한다. 그 자리에 앉아 노량해협을 가로지르는 남해대교를 올려다봤다. 역사적인 아이러니다. 사백이십여 년 전, 저 다리 너머 바다는 조명 연합과 일본 함대가 피비린내 나는 사투를 벌였던 곳이 아니던가.
반백 년 전, 일본 기술진의 도움을 받아 동양 최대 현수교인 남해대교를 그 역사의 현장 초입에 건설한 것이다.
충렬사와 일본인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 남해대교 공사가 한창이던 무렵 한 월간지에 실린 기사인데 지역 주민들의 제보였다.
일본에서 파견된 기술진들은 충렬사 앞 빈터를 숙소로 사용하였다. 컨테이너와 천막으로 구성된 간이숙소였다. 빨랫줄에 옷가지를 널어놓기도 하고, 간단한 취사도구들도 보였다. 나무 그늘 아래서 식후 오수를 즐기기도 했다.
어느 날 갑옷 차림 장수가 달려와 말에서 내리더니 느닷없이 목을 졸랐다. 기겁을 하고 가까스로 깨어 보니 꿈이었다. 조금 후 옆에 자던 동료도 유사한 가위눌림으로 잠을 설쳤다. 며칠 뒤에도 장수가 호통 치는 꿈을 꿔, 주민들에게 사당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다.
다음날 충렬사 앞은 말끔히 치워지고,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순환근무 차 본국에 돌아간 것으로 짐작했다. 하지만 다리 건너 육지(하동군)에 장비를 풀고 숙박하는 것을 이내 발견할 수 있었다.
충무공의 시신은 고금도로 운구하기 전까지 이 마을에 가매장(초빈)했다고 한다. 주민들이 성웅을 절대적인 지주로 여기고 있다면,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다. 일본인들의 가위눌림 사건도 분명 신이한 일이나 제보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충렬사 옆 승려들이 한때 머물던 암자(호충암)는 화방사의 말사(末寺)였다. 화방사 대웅전에서 조선시대의 검과 활, 화살통들이 발견됐다는 이야기는 오래전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