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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운 Feb 16. 2022

쌍계사

 팔순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님 생신을 맞아 고향에 왔던 때다. 여름휴가철 2박 3일의 짧은 여정이었다. ‘아침이면 신선이요 저녁이면 귀신이라는 말처럼 기력이 쇠진한 부모님을 곁에서 보는 마음 편치 않았다.

     

 다음날 고향에서 승용차로 한 시간 남짓 달려온 하동 쌍계사. 또 언제 부모님 모시고 이곳에 오겠는가 하는 마음이었다. 지리적 특징으로 인해 경내가 다소 답답한 게 인근 구례 화엄사와 비교가 된다. 그래도 매미 울음소리, 녹음이 짙은 계곡의 물소리가 끊이지 않으니 후끈 달아오른 폭염에 이만한 청량감을 어디서 찾으랴.

     

 9층 석탑 뒤 건축물인 팔영루(八詠樓)이다. 민족 정서에 맞는 불교음악(범패)과 그 명인들을 많이 배출한 곳으로 알려졌는데, 주춧돌에서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개천이나 들녘에 나뒹굴 잡석들이다. 간택(?)되어 절간에 들어오니 이처럼 옥석으로 대접받는다. 아이들이 매주를 빚는다 해도 이 돌보다는 형색이 낫지 않겠는가.


 부여받은 중책 혹은 결초보은 옹골찬 각오 때문인지 힘든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게 기특할 따름이다. 예로부터 이처럼 밝은 눈을 가진 이가 있어 발탁한 인물들이 세상사를 한층 더 올곧고 윤택하게 바꾼 사례가 허다하지 않았던.  

      

 대웅전에 이르는 계단 중간, 진감선사 대공탑비(眞鑑禪師 大空塔碑)가 자리하고 있다. 가람으로 면모를 갖추게 한 중창주인 진감선사. 그의 일대기와 공적에 대해 고운 최치원이 비문을 썼다 전해진다.

 해서체로 촘촘히 써 내려간 글자는 천 년 이상의 세월에도 식별이 가능할 정도이다. 전란은 이 자리도 비켜가지 않았으니, 곳곳에 탄흔이 깊숙하고 금방이라도 석문이 깨어져 내릴 것 같아 위태롭다.

     

 최치원은 중국의 빈공과에 급제하고, 토황소격문등 당대에 명성을 떨친 문장가요 유학의 대가로 우리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교의 진감선사를 장문에 걸쳐 예찬하고 있다는 것이 이채롭지 않는가. 두 사상이 서로 이질적이어도 그 시기에는 회통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대웅전 계단을 오르며 뒤돌아 본 대공탑비의 모습이다. 주위의 전각과 비문들은 대웅전 아랫방향으로 세워졌는데 대공탑비만은 길목에 그것도 비틀어져 있다. 가까이 보는 것만으로 만족했더라면 그냥 스쳐 지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이 의문의 열쇠는 독특한 가람 배치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쌍계사는 금당을 중심으로 남북 배치와 그 뒤에 창건한 현재의 대웅전 중심으로 동서 배치가 혼재하는 독특한 가람이다. 남북과 동서의 축이 교차하는 지점에 진감선사 대공탑비가 금당을 등지고 앉았다.

     

 또 하나의 궁금증은 대공탑비를 가람 중창 때 옆으로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 놔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당나라 육조 혜능선사의 유골 일부(頂相)를 금당에 봉안한 선종 종파의 차별성이나, 진감선사의 공덕과 이를 찬()한 최치원 사산비명(四山碑銘)의 역사적 가치 등을 존숭한 결정이었을까?

 시간이 퇴적된 대로 놔두면 되지 웬 시비냐고 스님들이 반문하는 것 같다. 부질없는 시비지심도 수행에 걸림돌일 뿐이라고.

        

  명부전 옆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인데 부처의 상징인 수인(手印)이 보이지 않는다. 앉은 방향이 대공탑비와는 달리 금당을 마주 보고 있다.   

     

 근엄하기보다 후덕하고 수더분한 이웃 같다. 지난 세월 장삼이사로 살아온 이들이 고달픈 삶과 애환을 이곳에  풀어내겠지만, 바람 되어 돌아가고 묘한 침묵만 남았.

 어쩌면, 어미의 간곡한 부탁도 뿌리치고 투항하지 않는 자식들. 토벌대가 나섰다는 소문에 놀란 가슴 부여안고 몰래 와 손바닥 나빌레라 빌고 또 비볐지 않았을까.

     

 혼불에서 효원을 찾아온 친정아버지가 사돈집 대문간을 나서며 다독거렸다. ‘세상에 제일 큰 것은 마음이니 그 안에 담지 못할 것이 없다.’라고. 그럼에도 강퍅하거나 곤궁한 집 아낙네들의 서리서리 맺힌 한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팔자에도 없는 복부터 온갖 넋두리 가리지 않고 넉살 좋게 다 들어주다 보니, 정작 자신은 늙을 겨를도 없는  여래불로 앉았. 요즘도 말없이 들어주는 귀가 주위에 많았으면 얼마나 살만한 세상일까 생각해 본다.

      

 부모님과 함께 금당 쪽으로 탐방하려고 했으나 가팔라서 망설이던 차에 하안거 중이라는 팻말에 발길을 돌렸다. 먼발치에서 금당, 탑전을 보던 나는 입적한 법정스님이 떠올랐다. 무소유책의 잊을 수 없는 사람에 수연(水然) 스님이 나온다.

     

 풋내기 시절 혼자 겨울 안거 때('59년) 저기 탑전에 홀연히 찾아온 수연 스님. 법정스님이 병이 나자 구례읍까지 먼 길 걸어 밤늦게야 탕제를 구해 온 스님이었다. 약사발을 마시며 어린애처럼 우는 법정스님을 말없이 손 붙잡기도 하고, 본인에게 위장 장애라는 지병이 있어도 밀행을 거듭하던 도반이라고 했다.


수연 스님의 슬픈 최후를 되새기고 싶지 않다던 법정스님. ‘인정이 많으면 도심이 성글다는 옛 선사의 말을 경책 삼으면서도 그 아픔이 오죽했을까. 청빈한 삶과 철저했던 구도 행각 그리고 형형한 눈빛이 새삼 그리웠다.

     

 일주문 쪽으로 걸어 내려오며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어 아버님께 들려드렸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하신다.

 2001년 지병으로 입적한 석용산 승려. 우리에게는 여보게, 저승 갈 때 뭘 가지고 가지』 에세이집으로 알려진 분이다. 물론 <PD수첩> 방송으로 온갖 비리 인물로 드러났지만 이 책에 나오는 104 꼭지가 모두 허구라고 폄하할 수 없을 것이다.

     

 소신공양(燒身供養)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책에서 하동 〇〇사 모 스님이라고 했다. 공부도 수행도 내팽개치고 허구한 날 망나니짓을 하다 몹쓸 병까지 얻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차가운 시선의 도반들을 엿 먹이기라도 하듯 절 뒤 소나무 아래에서 소신공양 시도까지는 했으나,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주변을 날뛰다 고통스럽게 죽었던 모양이다.

     

 며칠 뒤 요양 온 약간 실성한 여인이 그 소나무에 접근했다가 빙의가 되는 사태까지 번지고 만다. 급기야 큰 스님이 나서서 사십구재를 지내도 여인이 낫지 않자 백일 지장기도까지 지심으로 올렸다 했다.

     

 훗날 하동 모 사찰의 재가불자로 활동하던 분을 우연찮게 만났는데, 이 사건을 아냐고 물었더니 어떻게 알았냐고 되묻는다.

하동 어느 절이죠?”

〇〇사 아닙니까. 내가 모시던 큰 스님이 얼마나 애를 먹었는데요.”

잘 수습되지 않았어요?”

물 양동이 들고 번진 불 끄려 생고생을 했잖아요. 아니, 49, 백일 지장기도까지 했으면 됐지, 밤마다 큰스님께 소란을 왜 피워? 백일기도를 두 번이나 올리자 그때서야 이승을 떠나더랍니다. 우리 큰스님이 혼쭐이 났죠.”    

     

 소신공양이라 한다면, 베트남에서의 종교 탄압 항거나 티베트 독립을 위한 길거리 분신 등으로 보아왔다. 끝까지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고 꼿꼿하게 있는 모습에 전율과 충격을 받았던 게 사실이다. 그 책에서는 유체이탈의 경지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하나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이야기다. 지고(至高)의 반열에 오른 스님만 가능하다는 것이 아닐까.  


 소신공양이니 발심(發心)은 선후가 있을지라도 도를 깨닫는 것(悟道)은 앞뒤가 없다라는 경구가 어디 만만한 것이랴. 절도 사람이 사는 곳이니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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