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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운 Jun 18. 2021

명월이 만공산하니

 퍼붓는 땡볕은 잎사귀들이 얼기설기 막아도, 달구어진 지열은 내쉬는 숨마저 이내 후끈거리게 했다. 눈썹에 맺혀있던 땀방울이 안경알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린다. 안경을 벗어 들고 길옆 바위에 걸터앉았다.    


 입영을 불과 십 여일 남겨 둔 고향에서의 여름. 친구들과 어울려 조금 전까지 산 아래 해수욕장에서 보냈다. 일곱 명이 갹출한 경비를 많이 써버린 탓에 산에서 일박할 부식거리를 제대로 장만할 수 없었다.     

 짐을 나누어 챙기고 해수욕장을 빠져나오는데 인원이 세 명 더 늘어났다. 수원에서 왔다는 여자들이었다. 총무를 맡은 친구가 해수욕장 송림에서 꼬드긴 모양인데 주특기를 제대로 발휘한 것이다.   

  

 인기척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총무와 여자들이 산을 올라오고 있었다. 이 정도에서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 정상 가까이 올라와 야영할 수 있는 빈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텐트를 치고 저녁을 준비했다.

 해가 넘어가고 조금 있으니 제법 선선한 산바람이 불어온다. 한나절 찜통을 겪어낸 무던한 바위와 초목들이 내쉬는 숨결이다. 검푸른 동쪽 하늘에서는 보름 동안 가득 채운 일륜 명월이 교교히 자태를 드러낸다.


 모닥불을 지피고 기타 튜닝하는 소리, 낭랑하게 울려 퍼진다. 곧이어 나비소녀, 영아로 이어지는 현의 울림은 젊은이들의 감성을 톡톡 두드린다. 타오르는 불도 타닥타닥 불티를 튀겨 흥을 돋우는 가운데 술잔이 돈다. 슬로우 락 일색에서 슬로우 고고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런, 술 떨어졌다!”

“뭐?”

“어허! 처음부터 조금씩 돌리라고 했잖아.”

 예견은 했었지만 이처럼 빨리 실탄(?)이 바닥날 줄이야. 이 적막 산중 어디에서 술을 구하겠는가. 분위기가 냉랭해진다.    

“우리들이 가지고 온 술이 하나 있는데..”

 한 여자가 배낭을 뒤적인다. 다들 숨죽인 채 시선은 한 곳으로 모아지고 병 하나가 꺼내진다.

“어? 그건 동해 고량준데?”

 우리들은 얼굴을 마주 보며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보다 더한 천군만마가 있으랴! 새벽이슬 받듯이 한 두 방울씩 잔에 따라 돌린다. 속이 화끈 달아오른다.     


 현란한 코드워크와 스트로크에 혼을 쏟는 친구, 손뼉 치며 떼창 하는 녀석들이 있는가 하면, 여자들과 어울려 막춤 추는 녀석들도 있다. 어깨에 어깨를 맞잡았다. 어깨너머로 산 능선이 슬로우 비디오를 보듯 넘실거린다.     

 소변이 마려웠다. 야영장 가장자리로 나오니 한 녀석이 일을 보고 있었다.

“야! 좀 더 내려가서 하지 않고서는..”

 들은 체하지 않는 친구를 지나 허리까지 자란 풀들을 헤치며 아래로 내려갔다. 느닷없이 찬바람이 달아오른 얼굴을 획 스치고 지나간다.    

 

  내려다보니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풍치가 가히 명품이다. 어둑어둑한 산 능선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는 곳에 한 줌 보석들이 뿌려져 있었다. 해수욕장의 야경이다. 좀 더 귀 기울이면 떠드는 소리를 알아들을 것만 같다.    

 어깨를 감싸는 온화한 빛이 몸을 타고 내려 발목을 잡는다. 그 자리에 살며시 앉아보았다. 좀 더 안락하게 뒤로 드러누우니 에워싼 풀들이 알아서 자리를 편다. 팔베개를 베었다. 대자연의 기운이 포근히 내려와 앉는다.

“화사하게 내려다보는 저 얼굴은 누구인가?”

 뭐라고 나직하게 속삭이듯 하나 알아들을 수 없다.

“뭐라고?”

“그래, 그렇지 명월이 만공산할 진데.. 쉬어가지!”    


다음 날 친구의 이야기다.

 캠프파이어를 마치고 얼마 후 각자 텐트 속으로 들어갔다. 총무는 남아서 잔불 확인과 주변 정리까지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텐트마다 돌아다니며 자고 있는 친구들의 발을 세는데 턱없이 모자랐다. 자기 발까지 보태도 두 개가 행불이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조금 떨어진 여자 텐트까지 갔다.    

“거기 친구분 다 있어요?”

“네. 왜요?”

“진짜죠?”

“이상한 분이시네? 가요!”    

 면박을 당한 친구는 곧바로 사고임을 감지했다. 한 녀석을 깨워서 같이 행불자를 찾아 나섰다. 한동안 주변을 살피고 다니는데 어디선가 신호음이 잡혔다. 경사가 급한 가장자리를 따라 풀이 군락을 이룬 곳인데, 풀이 누워진 곳이 있었다. 팔베개를 베고 누워있는 미귀가자를 발견했다.    



“이제 정신이 들어?”

 텐트의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머리가 무거웠다. 고개를 돌려보니 머리맡에 총무가 내려다보고 있다.

“한여름이라도 높은 산 새벽 기온은 뚝 떨어져, 알긴 알아?”

“발신음(?)으로 찾긴 했다만 그 참!”

“..?”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절벽이야. 어떻게 그곳에 자고 있었냐?”    


어느새 나의 한 손은 친구 손등 위에 놓여 있고, 남해 금산과 나는 산연(山緣)이 있음을 뒤늦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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