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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화 Jul 11. 2021

1억은 모을 수 없어, 탕진잼

아미엄마가 부르는 작은 수필3

 “엄마, 5만 원짜리 열 장 있으면 1억 되지?”

 잠자리에 눕기만 하면 호기심이 더 왕성해지는 막내 녀석의 질문이었다. 

 “아니, 50만 원 되지.”

 내 대답에 약간 실망한 녀석이 다시 물었다.

 “그럼 이십 장 있으면?”

 백만 원이라고 대답하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뜬금없이 1억이 왜 궁금한 걸까?

 “그런데 희섭아, 1억은 왜?”

 “어, 1억 모아서 벌레 없는 집으로 이사 가고 싶어서.”

 아하, 감이 왔다. 자려고 누웠다가 벌떡 일어난 아이의 발치에서 1cm쯤 되는 딱정벌레 같은 것이 나와서 내다 버린 뒤였다. 대문 앞으로 우이천이 흐르고 주변에 덕성여대에서 심어놓은 나무가 많은 단독주택이라 유난히 벌레가 많다. 방충망이 있어도 여름내 모기, 파리, 하루살이에 시달렸고 가을에는 귀뚜라미를 비롯한 각종 벌레들이 잘 들어왔다. 구옥이라 그런지 공벌레나 다리가 많아 징그러운 돈벌레도 수시로 출몰했다. 식구들 모두 벌레라면 질색했지만 형편상 아파트나 신축 빌라로 이사 가긴 힘들었다. 게다가 이사의 이유가 벌레라니.

 어쨌든 나는 5만 원짜리가 이십 장이면 백만 원, 2백 장이면 천만 원, 2천 장이 있어야 1억이 됨을 찬찬히 설명했다. 그리고 네가 원하는 벌레가 없는 집은 1억으론 안되고 최소한 3, 4억은 있어야 하니 5만 원짜리가 6천 장에서 8천 장쯤 있어야 한다고 얘기해 주었다. 

 “힝, 그럼 난 포기할래.”

 아이의 풀죽은 말투에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와 입을 막았다. 대놓고 웃으면 “난 슬픈데 엄만 왜 웃어? 너무해. 엄마 나빴어!”라고 외칠 게 뻔해서였다. 지난 추석에 고모들에게 받은 용돈으로 불룩한 지갑을 들고 다니며 한동안 행복해하던 녀석에게 엄마가 너무 과격하게 현실을 인지시켰나 싶어 슬그머니 미안해졌다. 

 열심히 모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니까 그 많은 걸 언제 다 모으냐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희섭이가 어른 되면 한 달에 5만 원짜리 백 장씩, 아니 2백 장씩 벌 수 있어. 그럼 금방 모을 수 있어.”

 “진짜?”

 고개를 슬며시 들긴 했지만 아이는 딱히 기뻐하진 않았다.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인 자신이 어른이 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으며 그때까진 벌레와의 동거가 이어지리라는 생각을 했을 거라 짐작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또, 녀석이 어른이 되었을 때 한 달에 천만 원씩 벌어 절반인 5백만 원씩 매달 저축해도 꼬박 5년이 지나야 3억이 될 것이고 그때는 집값이 더 올라 그 돈으로 자그마한 신축 빌라도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물론 한 달에 천만 원씩 버는 거 자체가 쉽지 않을 거란 얘기도 당연히 안 했다.

 모처럼 두툼한 지갑을 지니게 된 막내는 “내가 쏠게.” “내가 사 줄게.”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낡은 샌들을 바꿔주며 엄마 아는 모든 사람들한테 자랑하라고 하더니, 늦깎이 공부에 버거운 책값도 보태주었다. 마트에 간다니까 “작은누나, 맘대로 골라.” 하기도 했다. “한 개만.”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물론 지가 좋아하는 헬로카봇 신형로봇은 이미 산 후였다.

 이 조그만 녀석이 벌써 탕진잼을 알았나, 웃기면서도 조금 걱정이 됐다. 탕진잼은 소소하게 낭비하며 느끼는 재미라는 뜻의 신조어다. 방탄소년단의 <고민보다 Go>라는 노래에 ‘탕진잼 탕진잼 탕진잼’이라고 반복되는 후렴구가 들리는 듯했다.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땐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플루트 소리가 좋았다. 영화나 드라마 배경에 나와도 어울릴 듯한 경쾌한 플루트 소리를 따라 흥얼거리던 어느 날 작은딸이 “탕진잼 탕진잼 탕진잼”이라는 부분만 신나게 따라 했다. 그 뒤로 가사를 자세히 들어보았다. 


돈은 없지만 떠나고 싶어 멀리로/ 난 돈은 없지만 서도/ 풀고 싶어 피로/ 돈 없지만 먹고 싶어 오노 지로/ 열일 해서 번 나의 pay/ 전부 다 내 배에/ 티끌 모아 티끌 탕진잼 다 지불해/ 내버려둬 과소비 해버려도/ 내일 아침 내가 미친놈처럼/ 내 적금을 깨버려도

-방탄소년단 <고민보다 Go> 중-


 위의 가사만 보면 어려운 시대를 보냈던 사람은 잔소리가 폭발할지도 모르겠다. ‘티끌 모아 태산’인데 조금씩 모아서 잘 살 생각을 해야지, 예전엔 밤낮없이 일해서 식구들 목구멍에 풀칠하는 것만도 감사했다, 등등 끝이 없을 수도 있다.

 <고민보다 Go>에서 내가 만난 소년들은 나와 비슷했다. 어차피 늘 가난한데, 돈 생기면 일단 하고 싶은 일에는 쓰고 보자는 생각부터 ‘티끌 모아 티끌’ ‘내 미랜 벌써 저당 잡혔어’ ‘쥐구멍 볕들 때까지’ ‘내 일주일 월화수목 금금금금’ 하는 부분까지, 넘치도록 공감할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 셋을 키우며 부지런히 일했다. 아니, 부지런히 돈을 벌었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빚 없이 좋은 집에서 살고 있었을까? 애초에 남편이 사업을 시작한 것은 직원 몇 명인 작은 회사 직원 월급으로 아이 둘-그때는 둘이었다-을 키우기 힘들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저 배곯지 않을 정도로 먹이고 헐벗지 않게 입히는 정도는 할 수 있을 터였다. 작은딸은 ‘소이증’이라는 선천성 기형을 가지고 태어나 한쪽 귀 모양이 일그러져있다. 성장기가 끝날 무렵 성형수술을 해주면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자신의 월급과 내 아르바이트비로 그 간단한 비용을 마련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의도한 바와 다르게 더 힘들어지긴 했으나 계속 회사원 생활을 했다한들 빠듯한 월급만으로 좋은 집은 마련하지 못했을 거다. 

 엄청난 부자가 되려는 욕심은 없다. 편안히 쉴 수 있는 내 집에서 충분히 먹고 입을 정도면 된다. 아이들 아플 때 병원비 걱정, 더 배우고자 할 때 교육비 걱정만 안 하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웠다.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일해서 ‘티끌’을 아무리 모아도 여전히 ‘쥐구멍’은 어둡기만 하니 미래가 ‘저당’ 잡혔다고 할 밖에. 


내 통장은 yah/ 밑 빠진 독이야/ 난 매일같이 물 붓는 중/ 차라리 걍 깨버려/ 걱정만 하기엔 우린 꽤 젊어/ 오늘만은 고민보단 Go해버려/ 쫄면서 아끼다간 똥이 돼버려/ 문대버려/ DOLLAR DOLLAR/ 하루아침에 전부 탕진/ 달려 달려

-방탄소년단 <고민보다 Go> 중-



 이런 상황에 ‘밑 빠진 독’을 깨고 탕진해버리라는 이 당찬 소년들에게 같잖은 충고는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아들의 씀씀이가 걱정되는지 남편은 함부로 쓰지 말고 모으라는 잔소리를 하곤 했다. 내게도 모으는 법을 알려주라며 벌써 쓰는 걸 좋아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어쩌면 나도 은연중 그런 생각을 했나보다. 친정엄마가 귓구멍이 크면 돈이 펑펑 샌다는 미신을 들이대며 내 씀씀이가 헤프다고 야단치던 것이 생각나 아이의 귀를 들여다보기도 했으니 말이다. 나처럼 가난하면 어쩌지, 돈 없어 쩔쩔매며 힘든 삶을 살면 어떡하지, 조바심치면서 돈 쓰는 것 자체를 ‘탕진’이고 ‘낭비’라고 규정지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들은 지갑이 비어갈 즈음, 다른 공약을 내세웠다. 돈이 모이면 엄마한테 롱패딩을 사주겠다는 거였다. 큰누나 패딩을 입고 다니는 엄마가 제 눈에 안쓰러웠는지…. 어쨌든 친척어른들의 용돈으로 지갑을 다시 채운 막내는 롱패딩 대신 패셔너블한 바지를 하나 사주었다. 만 원짜리를 다 써도 되겠냐는 물음에 천 원짜리가 남으니 괜찮단다. 지갑에서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네 장을 꺼내 나름 화통하게 결재하는 녀석에게 옷가게 사장님은 잔돈으로 오천 원짜리 한 장을 더 내주었다. 

 다시 비어버린 지갑이 허전하지 않은지 아이에게 슬며시 물어보았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가 좋으면 나도 좋고, 엄마가 나쁘면 나도 나빠. 엄마가 기분 좋으면 되는 거야.”

 이 꼬맹이는 소소하게 ‘낭비’하며 재미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지갑을 탈탈 털어서라도 지금 행복할 수 있는 방법에 집중하고 있었다. 지갑은 비었지만, 아이의 마음은 가득 차올랐다. 당장 좋은 집에 이사 가지 못 하는 것에 대한 불만은 이미 사라진듯했다. 돈만 있으면 상황이 해결될거라고 생각했던 엄마는 반성하는 마음이 살짝 들었다.


 아들의 마음은 기특하지만, 여전히 가난한 엄마에게 탕진잼은 풀리지 않는 고민거리다. “Where my money yah, 탕진잼 탕진잼 탕진잼” 노래나 불러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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