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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화 Jul 11. 2021

어머니의 뒤집개

  “야야, 니 적 쫌 꾸어 주래?”

  부엌에서 내내 서성거리시던 시어머니께서 묻는다.

  방바닥에 눌어붙어 있던 남편이 입만 움직인다.

  “어, 해주게. 안 그래도 입이 궁금하네.” (사투리지만 어머니께 쓰는 남편의 하게체는 여전히 어색하다.)

  시어머니 보실 새라 잠시 남편에게 눈을 흘겨주고 나는 부엌으로 나간다.

  “어머니, 뭐 거들까요?”

하는 내게 늘 ‘됐다.’ ‘할 것도 없다.’ ‘드가서 얼라나 봐라.’ 하신다. 그래도 어머니께서 뭘 하시는지 보기라도 해야지, 방에 들어가 있으면, 남편은 편하게 눌어붙은 방바닥이 나한테는 파도라도 치는 듯이 꿀렁거려 불편하다. 오늘도 딸은 ‘저런 아는 열도 키우겠다.’는 말을 열댓 번도 더 들어가며 혼자 잘도 놀고 있다. 모유 수유도 끝난 마당에 잘만 노는 아이를 보겠다고 시어머니 혼자 부엌에 계시게 하고 방에서 빈둥거리기엔 며느리 연차도 짧고 얼굴도 두껍진 않다.

  그렇게 부엌에서 서성이며 어머니께서 부친 전을 방으로 한 장씩 날라 댄다. 얄밉게도 남편은 무척이나 쩝쩝거리며 잘 먹는다.

  “엄마도 좀 들어와 먹게.”

  “니나 마이 무라.”

하는 정도의 짧은 대화 속에 전을 담은 접시는 채워졌다 비워지기를 반복한다. 고소한 기름 냄새에 딸내미는 손으로 전을 집었다 내렸다, 입에 넣었다 꺼냈다하며 기름 범벅이 되어 가고, 남편과 시어머니는 그저 그냥 두라는 말뿐이다.

  첫아이라 초보 엄마였던 나는 마당에서 날아 들어온 개털이 전과 함께 아이 입으로 들어가려는 걸 보며 전전긍긍이다.

  그럭저럭 접시전쟁이 끝나면 어머니가 설거지거리를 차지하기 전에 얼른 설거지를 시작한다. 처음엔 초보 며느리가 못 미더워 설거지도 안 시키나 했는데, 겪어 보니 그저 당신이 하시는 게 마음 편한 듯하다. 딸이고 며느리고 아들이고 사위고 뭐하나 시키는 걸 못 봤다. 그러니 더 엽렵하게 설거지대를 차지해야 한다.

  설거지를 하려는데 어머니가 부침을 하시던 뒤집개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선명한 주황색 플라스틱 뒤집개다. 요즘은 환경호르몬 어쩌고 하며 팔지도 않는, 얼마나 오래 사용했는지 끝이 닳아서 원래 모양보다 비뚤어진 주황 뒤집개. 초등학교 때 수업 끝나고 오는 길, 리어카 집 떡볶이 아줌마가 10원에 한 개씩 밀가루 떡을 세어 넣어 주던 그 뒤집개와 꼭 같은 느낌이다. 그렇다면 30년 묵은 뒤집개?

  그러고 보니 시댁에 있는 물건은 오래된 것이 대부분이다. 큰형님이 결혼 전에 샀다는 코렐 밥그릇, 형님 결혼 전이면 적어도 20년 전 물건이다. 둘째 형님이 언제 사드렸는지도 모른다는 반들반들해진 돕바(점퍼나 외투가 아니라 꼭 돕바라고 불러줘야 어울린다.), 남편이 어릴 때 썼다는 어린이 수저까지. 버려지거나 새로 들어오는 물건은 거의 없다. 자식들이 뭐든 사다 드리면 다른 자식들에게 나눠주니 그렇다. 우리도 갈 때마다 형님들이 놓고 간 선물세트나 어머니의 수확물들을 바리바리 싸 오는 게 일이니까.

  반면 친정엄마는 도무지 낡고 쓸모없는 것들을 견디지 못한다. ‘에이, 굴러다니기만 하고 쓰지도 않는 것.’ 하고 버리는 게 일이다. 그래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필요하다고 새로 산다. 필요 없어 보이는 물건을 사 두었다가 얼마 쓰지도 않고 버리는 일도 있다. 농담반 진담반, 우리 집은 그래서 가난한 거라고 엄마한테 툴툴거린 적도 많다. 그래서 플라스틱 주황 뒤집개가 환경호르몬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내게 감동으로 보이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며느리 연차가 늘어가고 막내라 생각한 작은딸이 둘째가 되고 막내아들이 또 아장아장할 무렵, 어머니는 더 이상 예전 어머니가 아니게 되었다. 밑반찬이며 국거리를 바리바리 싸 들고 가서 넣어 두어야 했고, 우리가 들고 나올 수 있는 것은 버리지 않고 모아 놓은 재활용 쓰레기나 생활 쓰레기, 혹은 냉동실에 더 이상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얼려 놓은 데친 나물이나 빻은 마늘뿐. 둘째를 낳은 후 아버님 제사를 모셔왔고, 어머니는 당신 할 일은 다 마쳤다는 생각을 한 걸까. 조금씩 정신이 흐려졌다. 막내 낳기 전 산후조리를 핑계 삼아 반강제로 모셔왔지만, 당장 내려가야겠다는 말씀만 반복했다. 결국 일주일 만에 시골집으로 다시 모셔다 드릴 수밖에 없었다. 다섯이나 되는 딸들도 번갈아가며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당신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시골집을 지키시며 어머니의 생활은 점점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한겨울이 되면 어머니는 바깥 수도가 얼지 않게 물을 조금씩 틀어놓는 대신 냇가에 가서 얼음을 깨고 물을 떠다 쓴다. 연탄보일러 아궁이에는 신문으로 불을 붙여 땔감을 집어넣는다. 그래도 몸은 건강하셔서 병원으로 모실 수는 없다. 그런 모습을 보는 자식들은 마음 아프고 신경 쓰였지만 정작 어머니는 당신 집에서 너무 편안해 보인다. 결혼 전 처음 인사드리러 갔을 때 말 한마디 안 하시고 그저 미소만 보이시던 분이 손자 손녀들과 타령조의 노래를 하고, 쓰레기를 대문 옆으로 치우라며 소리 지르는 옆집 아주머니에게 욕설 섞인 고함을 돌려준다.

  그런 어머니께 며느리랍시고 ‘장기요양보호 서비스’를 신청하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나마 매일 드나들며 식사라도 챙겨 드리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음식 하는 법도 거의 잊으셨는지 해놓은 음식만 찾아드시는 정도이고, 전과 다르게 부엌으로 가는 며느리를 말리지도 않는다. 그래도 아들네가 왔다 하면 뭐라도 해 주려고 부엌을 서성인다. 싱크대에 달걀을 꺼내놓고도 뭐 해 먹을 게 없다며

  “계란이라도 있나 볼까?”

하고 또 냉장고 앞으로 간다.

  싱크대 앞을 차지하고 서서 방에 들어가시게 해 봐도 다시 나오셔서 같은 말씀을 반복한다. 그러곤 내가 깨 놓은 달걀 껍질을 치우는 어머니.

  어머니의 기억은 옛날 어딘가에 머무르지만 그 마음은 그저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 곁에 있다. 신혼 초, 음식을 하던 당신 곁에서 서성이던 나처럼 어머니는 계란말이를 하는 내 옆에서 서성인다. 그리곤 음식을 하는 도중 나오는 설거지거리를 얼른 받아서 씻어놓고, 또 씻어놓고 한다. 무심코 계란말이를 하다 보니 손에 잡힌 것이 예전 주황 뒤집개가 아니다. 어머니께서 살림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형님들이 옛날 물건을 하나씩 새것으로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버리고 새로 사야 하는 물건들인데도 어쩐지 새 물건이 산뜻하게 보이지 않는다. 설거지를 마치고 다시 내 옆을 서성이며 행주질을 하는 갈라진 어머니의 손끝이 어쩐지 주황 뒤집개와 꼭 닮아 보여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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