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몇 십 년 혹은 몇 년 뒤, 오염된 바다에서 멸종 어류들이 떼거지로 나올까 걱정이다.
“엄마, 호랑이 꺼내 줘!”
수제 비누 속에 호랑이 한 마리가 늠름하게 서 있었다. 동물 장난감이 비누 속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는지 아들 녀석은 꺼내 달라고 방방 뛰었다.
“손 깨끗하게 열심히 씻으면 호랑이가 나올 어… 까?”
비누 속 호랑이가 모형인지, 아니면 무늬인지 순간 구분이 안 되어 말꼬리를 급히 바꾸었다. 무늬라면 비누를 쓰면 쓸수록 호랑이도 함께 없어져 버릴 테니까. 비누를 들고 손을 씻겠다며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는 아들을 뒤로하고 비누의 출처인 딸들에게 호랑이의 생사를 확인하기로 했다.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6학년인 두 딸은 ‘지역 아동 센터’에 4년째 다니고 있다. 지역의 저소득층 아동을 위한 지원 사업으로 방과 후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오카리나 같은 간단한 악기 연주를 가르치기도 하고, 미술 활동, 인성 교육, 체험학습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가끔 후원으로 들어오는 학용품을 받아서 쓰기도 했다. 학용품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머리 끈을 한 뭉치 받아 오기도 하고 생리대나 비타민, 크리스마스 때는 과자를 받아 오기도 했다. ‘호랑이 비누’ 포장지에는 ‘이 비누는 어린이들의 위생 환경을 해결하고 멸종위기 동물을 알리고자 KB국민카드 장희정 직원이 직접 만들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인쇄된 종이 상자에 이름 칸만 비어 있는데 만든 직원이 자신의 이름을 적은 모양이었다. ‘직장 생활하기만도 힘들 텐데, 이런 일에 강제 동원된 것은 아니겠지?’ 문득 비집고 들어오는 멋쩍은 생각을 접고 큰딸에게 물었다.
“비누 쓰다 보면 이 호랑이 나오나?”
“엄마, 멸종위기 동물 보호를 위한 캠페인이라는데, 비누를 쓰니까 호랑이가 없어져 버리는 건 너무 동심 파괴 아니야?”
딸아이는 같이 센터를 다니는 친구가 궁금한 마음에 비누를 잘라서 호랑이를 꺼냈으니 비누와 호랑이가 같이 녹진 않을 거라며 호랑이가 멸종위기라니 놀랐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도 좀 충격받긴 했다. 멸종위기종이라고 하면 막연히 희귀 동물을 떠올렸다. 호랑이는 흔히 볼 수 없어도 친숙한 동물이라 이제 우리나라에 살 수 없겠다 싶으면서도 멸종위기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에서 분류한 멸종의 위기 등급에 따르면, 생존하는 개체가 단 하나도 없는 것이 절멸(Extinct, EX), 동물원이나 보호구역에 제한적으로 생존하는 것이 야생 절멸(Extinct in Wild, EW)이며 그다음이 심각한 멸종위기종인 위급(Critically Endangered, CR)과 멸종위기종인 위기(Endangered. EN)이다.
위기(EN)에 시베리아 호랑이가 속해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백두산 호랑이다. 1996년 4월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식물종의 국제 거래에 관한 협약(CITES)에 제출한 보고서에 남한 지역에 호랑이가 없음을 명시하였다. 물론 우리 일상에서 호환(虎患)은 없어진 지 오래다. 폐쇄적인 북한의 특성상 구체적인 정보를 알 수 없지만, 해외 학자들에 의해 호랑이나 그 흔적을 목격하였다는 증언이 있고, 지리상 야생 호랑이가 중국, 러시아 국경 지역을 통해 진입할 가능성은 존재한다. 실제로 야생 호랑이가 서식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위기에 속하는 동물에 시베리아 호랑이뿐 아니라 승냥이, 두루미, 따오기, 침팬지, 황새 등 익숙한 이름이 많이 보였다.
인간이 동물들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환경운동가도 아니고 대단한 영향력이 있는 인사도 아닌 평범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쓰레기 분리수거나 일회용품 안 쓰기 정도?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늘면서 배달도 따라 늘고 재활용 쓰레기가 포화 상태라는 기사를 봤다. 플라스틱, 일회용품은 안 쓰겠다고 다짐하는 댓글이 줄줄이 올라오고 있었다. 과대 포장을 줄이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거나 중국집처럼 음식 배달 후 그릇을 수거하게 규제를 해야 하고, 분리수거 표준안을 만들고 재활용 산업에 투자해 기술을 개발하고 인력을 확충하라는 꽤 구체적인 대책을 내놓는 댓글도 많았다. 그런 댓글마다 ‘좋아요’가 몇백 개씩 달렸다. 이런 사람들이 많으니, 커피숍에서 일회용 컵과 플라스틱 빨대를 몰아낸 것처럼 하나씩 하나씩 환경을 위한 실천이 이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이것이 옹벤져스(옹산+어벤져스)의 힘인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옹벤져스는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에 나온 시장 아줌마들이다. 자칭 옹산(드라마 설정상의 동네 이름)의 심장, 옹심이라는 아줌마들이 뭉쳐 연쇄 살인마의 위협에 겁먹은 주인공 동백이를 지키기 위해 순찰에 나서고 결국 지켜 낸다. 남자 주인공 용식이는 “까불이(살인마)는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될 수 있고, 계속 나올 거야.”라는 살인범에게 이렇게 얘기를 한다.
“니들이 많을 거 같냐, 우리가 많을 거 같냐? 나쁜 놈은 100중에 하나 나오는 쭉정이지만 착한 놈들은 끝이 없이 백업(back up)이 돼야. 그게 바로 쪽수의 법칙이고 니들은 영원한 쭉정이, 주류는 우리라고.”
이렇게 평범하지만 올바른 사람들이 주류이기에 쭉정이들이 아무리 지구를 망쳐도 다시 복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과한 비유일까.
아무리 애를 써도 일단 망가진 환경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고, 호랑이는 어쩌면 더 줄어들지도 모른다. 가까운 미래에는 공룡처럼 호랑이도 모형이나 영화로만 만날 수 있는 전설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그래도 2010년에 벵골 호랑이, 남중국 호랑이, 수마트라 호랑이 등을 포함한 호랑이가 3100마리였던 것에 비해 2017년 기준으로 총 3890마리라니 영 희망이 없는 것은 또 아닐지도 모르고. 아이들과 함께 환경과 멸종 동물에 관한 책이라도 찾아 읽으며 이야기를 한번 나눠 볼까….
당장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로 끝없는 생각 속을 달리는데, 아들이 호랑이 모형을 들고 달려왔다.
“엄마, 작은누나가 호랑이 꺼냈어!”
비누를 잘라 호랑이를 꺼내더라는 큰딸의 말에 행동대장 작은딸이 비누를 조각내고 호랑이를 꺼낸 것이었다. 조각난 비누와 아직 군데군데 비누가 들러붙은 호랑이를 보니 ‘으악!’ 소리가 절로 나올 거 같았지만, 꿀꺽 삼키고 잘했다고 해 주었다. 조각난 비누야 그거대로 모아서 쓰면 되니까. 호랑이 모형을 들고 통통거리는 아홉 살 꼬맹이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우리 집에선 호랑이를 한 마리 구출했다.
진짜 호랑이와 환경을 위한 삼벤져스(삼 남매+어벤져스)의 활약을 볼 수 있는 날도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