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2024년 수수밭길동인지 8호 <수필 오믈렛> 수록)
아이들이 고3, 고1, 초6... 육아는 여전히 힘들기만 하지만, 반이상 잘 해냈다고 스스로를 믿어보고 싶다.
“선생님이 간식으로 ‘호로록 빵’ 주셨어.”
뭣이라? 호로록 빵? 어린이집 다니던 막내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종알거린 말이었다. 국수를 호로록 먹고 빵이라고 하는 건가? 호빵을 호로록 불어서 먹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이거냐 저거냐 물어봐도 다 아니란다. 도무지 뭘 얘기하는 건지 짐작되지 않았다. 아이에게 찬찬히 설명을 시켜 보니 동그랗고 위쪽에 과자 같은 게 붙어 있으며, 안쪽은 폭신한 빵이란다. 호로록 빵의 정체는 ‘소보로빵’이었다. 선생님이 한 “오늘 간식은 소보로빵이야.”라는 말이 아들 귀에는 ‘호로록 빵’이라고 들렸나 보다.
아이의 귀여운 말은 제멋대로 통통 튀는 생각이 만들어 낸 실수일 때가 많았다. 한번은 어깨가 아프다는 내 등 뒤에 붙어서 “엄마, 내가 젊었던 힘까지 내서 안마를 해 주겠어!”라고 말했다. “젊었던?” 하고 되묻는 내게 한 대답이 걸작이었다.
“어, 나는 지금도 젊지만, 더 젊었던 힘을 내는 거야.”
겨우 초등학교 1학년 주제에…. 어깨가 아픈 것도 잊고 웃음을 터트렸다. ‘젖 먹던 힘까지 낸다’라는 표현과 뜻을 알려 주고 어디서 들은 말인지 물어보았다. 만화영화에 나온 말인데, 젊을수록 힘이 세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단다. 자기 맘대로 듣고 해석해서 적당한 때에 적용한 거였다.
코로나 탓에 제대로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3년이 훌쩍 지나고 다시 학교에 적응할 시기에 이르니 아이는 초등 고학년이 되었다. 실수가 줄었다는 뜻이다.
“야, 너 이렇게 공부 안 해서 뭐 되려고 그래? 영어 단어 하루에 10개 외우는 게 뭐가 어려워?”
얼핏 들으면 엄마가 아이에게 하는 잔소리 같지만, 고 2 큰딸이 중 3 작은딸에게 하는 잔소리다.
“아아아아, 안 들려. 나 영어 안 외워, 농사지을 거야.”
징징거림 반, 장난 반으로 대꾸하는 작은딸.
“야, 땅도 없는데 네가 무슨 농사를 지어? 너 소작농 할래?”
소작농이라니…. 좀 슬퍼지려 하는데, 작은딸이 제 방으로 도망가며 대답했다.
“그래, 나 소 농장 할 거다.”
농담이라고 생각해 웃는 나를 작은딸은 어리둥절하게 바라봤다. 설마 소작농을 모르냐며 킬킬거리는 내게 작은딸은 수업 시간에 소작농에 대해 배웠다며 몰라서가 아니라 잘못 들어서 실수한 것이라고 발버둥 쳤다.
웃으면서도 이제 곧 6학년이 될 아들은 ‘소작농’을 알까 궁금도 하고 걱정도 되던 차에 녀석이 쫓아와서 왜 웃냐고 물었다. 소작농 때문이라는 내 대답에 그게 뭐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검색해 보라니까 아들은 휴대 전화 검색창에 ‘소장농’이라고 써넣었다. 작은 장롱인가 싶었다나. 어릴 때는 저 엉뚱미가 그저 웃기기만 했는데 이제는 어휘력 수준이 걱정되었다.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사연이 생각났다. 사장이 알바생에게 ‘설빔’ 하라며 봉투를 줬더니 “설빙이요?”라고 했다는 이야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아이들에게도 물어보니 ‘설빙’에서 망고 빙수 시켜 달라며 시끌벅적해졌고, 괜히 지갑만 축날 뻔했다.
어릴 때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살 수 없었던 한을 풀기라도 하듯,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사 주었다. 살림이 어려워서 낮에는 보험 일을, 밤에는 야간 콜센터 알바를 하던 때에도 남편 몰래 할부로 책을 사들이곤 했었다. 밤이면 아이들을 이불 속에 몰아넣고 그렇게 사들인 책을 읽어 주었다. 그래서 내 아이들의 어휘는 풍부할 거라고 막연히 기대했었나 보다. 이제 같은 이불에서 잠들지 않을 정도로 커 버린 아이들은 책보다는 유튜브를 더 많이 보게 되었고, 대화에 사용하는 거의 모든 어휘를 소셜 미디어나 OTT 매체로 배웠다. 그러면서 아이들의 어휘력은 나의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소보로빵’을 ‘호로록 빵’으로, ‘젖 먹던 힘’을 ‘젊었던 힘’으로 잘못 알아듣는 귀여운 실수를 하는 정도가 아니다. ‘설빔’이라는 설레는 우리말을 못 알아듣고, ‘소작농’이라는 역사 속 아픈 단어를 수업 시간에 배워서 간신히 기억하는, 전혀 다른 세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이들이 쓰는 신조어를 윗세대인 우리는 못 알아듣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는 말은 아이들이 모르는 단어투성이다. 세대 차이를 떠나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면 소통도 어려워진다. 세상이 너무도 빠르게 변화해서 우리가 배웠던 것과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것이 판이해지긴 했다. 언어란 것은 살아 있는 생물 같아서 태어나기도 하고 죽어 사라지기도 한다지만, 요즘 아이들은 어른의 언어를 너무 모르고 자신들만의 언어를 만들어 내니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는 기분이다.
파푸아뉴기니의 몇몇 부족들 사이에는 ‘모쉬’ 또는 ‘모쉬파이’라 불리는 관습이 있다. 주기적으로 각 부족의 어린이를 교환하는 것이다. 이 관습에는 부족 간의 교류와 이해 등 여러 가지 목적이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언어 사용으로 인한 오해와 다툼을 줄이는 것이다. 이 어린이들은 자신의 모국어와 타 부족의 언어를 함께 배워 나중에 부족들 간에 분쟁이나 문제가 야기됐을 때 이를 조정하는 외교 사절이나 통역가로 활약한다.
상황이 서로 다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머지않은 미래에 청소년, 청년, 중장년 간의 언어 소통을 위한 통역사가 필요하게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면 비약일까?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고 마스크 자율화가 이루어지면서 아이들이 감기에 걸리는 일이 잦아졌다. 마스크를 안 써도 벌금 낼 일은 없으니 그건 괜찮지만, 이런 시기에 오히려 바이러스가 창궐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잔소리를 했다. 문득 아이들이 ‘창궐’은 알고 있을까, 또 궁금해졌다. 어느새 눈치만 늘어난 아들은 말의 맥락을 살펴 정답을 내놓았다. 큰딸은 영화 『창궐猖獗』을 본 이야기를 하며 영화 보기 전에는 창궐의 궐獗이 궁궐의 궐闕인 줄 알았다고 했다. 나는 『창궐』을 보지 않았지만, 어휘 하나를 확실히 가르쳐 준 영화라는 생각에 찾아서 챙겨 봐야 하나 싶어졌다. 요즘 세대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이 좀 신경 써서 어휘 선택을 해 주면 나 같은 엄마들이 말하는 도중 단어 설명을 하느라 대화의 흐름이 끊기는 일은 없을 텐데….
아이들의 어휘력 향상을 도울 곳이 이렇게 없나 싶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