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돌아와야 하는지 가르쳐 준 하프 마라톤
한국말로 극복이라고 해석하는 ‘overcome’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한다. 왜 ’overgo’가 아닐까? 산을 힘겹게 넘어 어딘가로 도달하는 overgo. 이와 달리 overcome을 탄생시킨 사람들은 무언가를 넘는 상태에 초점을 맞추었다. 고향으로 돌아오듯 넘어가는 상태로 돌아오기. overcome을 만든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극복을 이해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어제의 나를 넘는 상태로 돌아와야 할까? 단번에 답을 내릴 순 없지만 희미하게 모습을 비춘 힌트를 쫓는다. 지난달, 난생처음 뛰어 본 하프 마라톤 당시로 기억이 도착했다.
태권도장 동료들과 함께 참여한 하프 마라톤. 우리 대부분은 선수로서 매일 고강도 훈련을 하기 때문에 별 다른 걱정 없이 달리기를 시작했다. 20km 달리기가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한 채. 출발 신호와 함께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12km 즈음, 반환점을 돌면서부터 다리의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내 몸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나 아가던 느낌은 어느새 저항을 온몸으로 버티는 느낌으로 변했다. 지구의 힘은 내 몸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잡아 당 겼다. 거대한 젤리 속을 뛴다면 이런 기분일 것이다.
20km 즈음, 결승선을 앞둔 반환점을 돌며 세상에나만 남았다. 나중에 기록표를 보고 내 앞에 40명, 뒤로는 300명이 있었음을 알았으나 이 순간만큼은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나뿐. 목적도, 경쟁도 사라졌다. 나는 홀로, ‘달리기’라는 상태 속에 살았다.
넘어가는 상태로 돌아올 때만 진실해질 수 있다. 내 세계 속에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기 위해 돌아와야 한다. 안정과 안주가 아닌 불편과 변화로 돌아와야 한다. 온몸이 고통으로 얼룩질 때 비로소 나 외의 다른 것은 모습을 감춘다. 그때가 되어서야 진실된 나를 마주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거짓을 말하던 내가 아니라 솔직한 나를 마주할 수 있다.
‘overgo’하는 사람에게 마라톤 트랙은 그저 결승선으로 향하는 수단일 뿐이다. 원하는 등수로 도달하지 못한 그에 게 지나온 길은 단지 실패의 흔적일 뿐이다. 반면 ’overcome’하는 자에게 트랙은 매 순간 의미를 지닌다. 길을 달리 는 내내 찾아오는 고통은 그에게 무너짐을 가르치는 학교이자 일어나길 소망하는 성전이다. 고통이 깊어질수록 그는 더 진실하게 자신과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