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동기화할 줄 아는 새가 되길 원한다
새는 악어 같은 파충류와 달리 두뇌에 겹이 하나 더 있어 다른 새의 울음을 동기화할 수 있다고 한다. 아마 그들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어떤 언어로 감정을 동기화해 서로 슬픔을 나누고 위로할 것이다. 누군가의 소리에 비슷한 음으로 화답하며 이런저런 감정을 나누는 새보다 스스로를 한 두 단계 더 진화한 동물이라고 자만하는 인간. 그중 하나인 나는 평소에 새보다 약한 감정 동기화 기능을 발휘하며 살아간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에 무딘 날들이 1년 중 꽤 많은 날을 채운다. 새보다 진화가 덜 된 게 아닐까 싶다.
이런 나조차 아주 가끔씩, 타인의 비극에 깊이 잠겨들 때가 있다. 그들의 비극에 나 자신을 동기화한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압사 사고, 연말에 나를 찾아온 무안 여객기 참사 소식까지. 신이 과연 있을까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비극적인 참사 앞에 서 비극에 동기화를 시도한다. 사고 현장에 내 가족과 친구가 있는 상상을 해본다. 가슴이 아프다.
근래 일어난 참사 중 기억 속에 오래 머물렀던 사건이 하나 기억난다. 24년 6월에 수원 화성의 일차전지를 만드는 제조 공장에서 화재가 났다. 스무 명 남짓이 유명을 달리하셨는데 사망자의 대부분이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노동자였다. 코리안 드림을 안고 낯선 땅을 밟은 그들이 스마트폰 배터리의 희생 제물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한국인 피해가 적었던 탓에 이 사고를 쏠린 사회적 관심은 덜 했다.
당시 나는 피아노 학원에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영등포구 대림동에 사는 이 친구들 대부분은 중국에서 왔다. 이들의 부모들은 자녀 세대에게 희망을 품고 한국 땅을 밟았다. 그들은 궂은일을 하며 번 돈을 학원비에 보태었다. 그래서 난 이들에게 피아노 연습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가르칠 책임이 있었다. 오징어 게임을 연상하는 한국식 무한 경쟁주의에 뒤쳐져 스스로를 안 될 놈으로 치부하지 않기 위해 친구의 진도보다 자기 페이스만 바라보도록 교육했다. 소중한 하루를 결과의 희생양으로 삼는 성과주의를 지양하고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중국인과 한국인 사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아이들에게 음악은 국경의 선을 넘나드는 언어임을 몸과 마음으로 가르쳐야 했다. 왜냐하면 난 이들이 커서 주눅 들기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커서 자기 안에 쌓인 다양한 문화를 섞어 창의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기 바랐다.
그들의 부모 중 상당수는 중국에서 대학 교육을 마친, 그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은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간 평균 소득 차이와 교육의 질 등을 이유로 이들은 가족과 함께 낯선 땅으로 오는 용기를 냈다. 이들은 다양한 일을 했다. 마라탕 집, 중국어 교사 등 특수성을 살린 일도 하고 일부는 건설 현장이나 공장에서도 일한다. 화재가 난 화성의 일차전지 공장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화성 공장 참사의 희생자 대부분은 중국 국적을 가진 여성 노동자였다. 불이 삽시간에 번진 탓에 이들은 공장에 갇혀 탈출을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들이 학원에 오는 아이들의 어머니라고 생각해 보았다. 타지에서 엄마를 잃은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슨 일인지 가늠조차 못한 채, 어리둥절함과 허망함이 뒤섞인 표정을 상상했다. 갑자기 남 일 같던 뉴스가 내 일이 되었다. 새가 다른 새의 울음에 맞장구치듯 떠나간 이들의 울음에 동기화해 마음으로 함께 울었다. 비록 내가 속으로 흘린 눈물이 거대한 불을 끌 수는 없지만. 몇 방울이 화염이 잦아드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길 바랐다.
새해에는 핸드폰 사진첩만 동기화하지 말고 먼지 쌓인 감정 레이더를 다시 가동해 여러 울음에 동기화하고 싶다. 비극의 책임 소재를 밝히고 죄지은 자를 욕할 힘을 아껴 한 마리 새처럼 동료의 울음에 힘껏 울어 주고 싶다. 그의 울음을 더 잘 듣기 위해 입을 다물고 귀를 열겠다. 그의 울음이 나를 지배하도록 놔두겠다. 그의 울음이 고막을 쥐고 흔들도록 최선을 다해 가만히 듣겠다. 어느새 그의 울음이 나의 울음 되기를 원하며.
사진 출처: 연합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