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의 자세

링 위의 음악가

by 사공사칠
Q. 나는 나를 자극하는 대상에 대해 초연할 수 있는가?


오랜만에 시합을 준비하고 있다. 쉬지 않고 있는 힘을 쥐어짜 샌드백을 두들기는 훈련을 했다. 말 없이 두들겨 맞는 샌드백은 오늘도 쓰러지지 않는다. 움직이는 샌드백과 겨루기를 마친 후 떠오른 생각을 팀 동료 비스트에게 털어놨다.


상대방을 움직이는 샌드백이라고 여기면 어떨까? 상대방을 아주 사나운 사냥감이라 생각하면 어떨까? 내가 마주한 상대를 살기를 지닌 사람이 아니라 길들여야 할 사냥감이라고 생각하면 이 상황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나는 대상을 장악하기 위해 기세를 읽고 연습한 동작을 수행할 뿐이다. 이것은 감정이 섞인 싸움이 아니며 맹수를 길들이는 사냥이다. 뜨겁지 않고 차갑다.


축구의 목적은 골을 더 넣고 덜 먹는 것. 야구의 목적은 많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 모든 스포츠는 목적이 있다. 격투도 목적이 있다. 종합 격투기, 킥복싱, 무에타이 등 정해진 룰은 다르지만 맨손과 맨발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동작의 간결함, 기술의 다채로움도 좋지만 목적을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어릴 적부터 깡패보다는 선비 같다는 말을 귀 닳도록 들어온 내게는 싸움꾼보다 사냥꾼의 시선이 목적을 이루는 데 낫다.


사냥꾼은 짧은 시간 동안 내 앞의 맹수를 관찰하고 특징을 느낀다. 그는 무엇에 강한지, 무엇에 약한지. 가진 습관은 무엇이며 고유한 호흡과 리듬은 어떠한지 깊이 듣는다. 사냥꾼은 사냥감의 기세를 느끼며 맹수 등에 올라타고자 한다. 기세(momentum)는 움직임(movement) 속에 흐른다. 사냥감은 힘차게 움직이는 활어다. 순간을 포착해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또 놓쳤다. 이번에는 운이 좋아 꽉 잡았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절대 놓칠 수 없다…


나는 디제잉, 특히 테크노나 트랜스 음악을 바이닐로 트는 디제잉 듣기를 좋아한다. 디지털 음원을 트는 CDJ와 달리 속도를 정확히 맞추기 어려운 바이닐 디제잉은 원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이 곡에서 저 곡으로 빠르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실력 있는 디제이는 사냥꾼의 자세로 음악이 들리는 현장과 넘어갈 다음 곡의 기세를 함께 느낀다. 이전 곡과 맞물릴 다음 곡의 볼륨을 올리는 동시에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한다. 돌아갈 때마다 속도가 조금씩 변하는 바이닐은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다. 실력 있는 사냥꾼은 바이닐의 활력에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곡을 길들여 단번에 목을 움켜쥔다. 두 곡의 주도권을 바꿀 타이밍이라고 느낄 때 그는 과감하게 판을 바꾼다. 흐름은 어느새 몰라보게 바뀌었다. 디제이는 다음 바이닐을 고르며 새로운 사냥을 준비한다.


훌륭한 격투가와 바이닐 디제이의 진가는 맹수가 예상을 한참 벗어나 움직이지 않을 때 더욱 반짝인다. 생각보다 더 거친 맹수를 만나더라도 실력 있는 사냥꾼은 품격을 잃지 않는다. 설령 이번 사냥이 실패해 맹수가 나를 잡아 먹을지언정 호락 호락 스스로를 내주지 않는다. 종이 울리기 전까지 이들은 잡아 먹히더라도 사냥을 멈추지 않는다. 이미 시선은 눈 앞의 맹수가 축 늘어진 상상에 가 있다. 그래서 턱을 맞아 기절하더라도 기권은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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