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기운이 좀 특별하세요"
‘사랑스러움’을 인격화한다면 배우 ‘정유미’가 되지 않을까. 물론 그 시작은 그녀의 외모 때문일 수 있겠지만 그녀를 오래 지켜봐온 이들이라면 알 테다. 단순히 외모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어떤 역할을 맡고 어떤 연기를 보여주든 어느새 스며 들고 마는 정유미라는 배우 자체의 것이 발광하는 사랑스러움이라는 사실을.
대중에게 정유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각인되기 시작한 시점은, ‘로맨스가 필요해 2012’의 ‘주열매’ 부터다. 싱그러운 꽃이 피는 시기에서 열매가 열리고 익어 떨어지는, 시들해지는 모든 순간의 연애를 생동하게 담아내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같이 주열매가 되어 마치 자신의 연애인 마냥 드라마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정유미는 보통의 연애를 대표하는 얼굴이 되는데, 이는 우리가 익히 접해 온 로맨스 장르의 여주인공들과는 결이 달랐다. 어떤 뚜렷한 플롯을 가지고 극적으로 만나고 또 헤어지다 결국엔 행복한 결합을 이루어내는 멋진 사랑의 모습이 아니라, 멋있기는커녕 찌질하고 상투적이며 실수를 연발하고 후회를 남기는, 연애의 지난하고 각박한 현실을 최대한으로 담아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드라마에서만큼은 판타지를 맛보고 싶어하는 대중에겐 그리 환영받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을 너무 닮은 이야기는 그 고통마저 닮아 버려 보는 이들이 몰입에 다소 거부감을 느끼기도 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정유미 특유의 사랑스러움이 드라마 상에서 누락된 판타지를 채워주었고, 덕분에 대중은 한 걸음 뒤에서 마음 편히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유미의 혜택은 로맨스 장르만 누린 것이 아니다. 화제성이 있든 없든, 상업 영화이든 독립 영화든, 주연이든 조연이든, 본인의 연기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그녀의 출연은 거리낌 없었다. 다양한 족적으로 가득 찬 정유미의 필로그래피를 보다 보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는데, 어떤 장르의 어떤 작품이고 어떤 배역이든 스친 작품이나 인물마다 그녀 본연의 사랑스러움이 묻어나지 않은 게 없다는 것. 주어진 배역을 온 힘을 기울여 이해하고 만졌기에 가능한 결과라 하겠다.
‘82년생 김지영’과 ‘보건교사 안은영’을 예로 들어보자.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두고 있으며 여성 중심의 서사라는 것, 그리고 기존의 관념으로 풀이될 수 없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것에서 공통점을 지닌 두 작품은, 각각의 여성 캐릭터를 정유미를 통해 구현함으로써 다소 어둡거나 혹은 괴기스러워 몰입이 쉽지 않았을 인물에게 친근감을 부여하며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82년생 김지영’은 여성이 사회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차별의 고통을 다루었다는 이유로, 작품이 수면 위로 올라온 순간부터 편견 어린 시선들이 논란거리로 삼으면서 배우를 섭외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출연을 결정한 정유미의 선택이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그녀는 대다수가 사랑해 마지않는, 쉽게 말해 안티를 찾기 어려운 배우 중 하나다. 즉, 정유미의 ‘김지영’이 그나마 덜 공격받으며 좀 더 많은 사람들 앞에 세워질 수 있었던, 그리하여 좀 더 많은 지지와 이해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독특한 세계관을 가진 여성 히어로, ’보건교사 안은영’ 또한 마찬가지다. 정유미를 만나, 겉보기엔 기이한 능력을 가진 괴짜에 지나지 않았으나 실은 자신이 속한 세계와 사람들을 누구보다 사랑하여 매순간 본인의 불행을 감수하면서까지 친절을 베푸는 모습으로 탄생했다. 정유미의 사랑스러움이 기괴한 설정이 갖는 거리감을 무너뜨리면서 우리로 하여금 안은영에게 바싹 다가가 본연의 모습과 제대로 맞닥뜨리도록 도운 것이다. 이 역할을 정유미가 아니면 도대체 어떤 배우가 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종종, 정유미란 배우가 우리 곁에 있어 위안이 된다. 어떤 세계와 삶도, 어떤 인물도 그녀를 통한다면 사랑스러움을 입고 이해를 받을 테다. 어쩌면 그녀의, 주어진 세계와 삶,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에 뭉클함과 애틋함이 들어차 있어 가능한 것일지도. 서로를 향한 혐오가 극심해지고 분노와 절망이 쉽게 부풀어 오르는 오늘, 우리는 정유미와 그녀가 다방면으로 구현하고 있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 곁의 누군가를 향한 사랑과 이해의 걸음을 한발짝 더 내딛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