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온’의 ‘수영’, 선입견을 뚫고 인생캐릭터를 만나기까지
배우가 인생캐릭터를 만나는 데에는 여러 조건이 뒤따른다. 차분히 쌓아온 경험과 노력에서 비롯된 연기력, 자신과 안성맞춤인 캐릭터를 알아보는 안목,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적합한 타이밍에 맞추어 작품을 들이밀어주는 천운까지. 이들이 정확히 교집합을 이루는 구간에서 배우의 인생캐릭터가 피어나는 것이다.
해당 작품이 좋은 성과까지 거둔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배우 개인에겐 더없이 명예로운 기록이다. 대중에게 자신을 인식시킬 만한 캐릭터를 만들어냈다는 건 연기력을 인정받았다는 의미나 마찬가지니까. 영화 ‘막다른 골목의 추억’의 ‘유미’와 ‘걸캅스’의 ‘양장미’를 거쳐 JTBC 드라마 ‘런 온’(연출 이재훈, 극본 박시현)에서 드디어 본인의 인생캐릭터를 만난 배우 ‘수영’이 그러하다.
“기회라는 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올지 모르는 거잖아, 방금처럼”
화제성이 중요시되는 오늘, 유명 걸그룹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배우의 세계에 진입하는데 있어 프리패스의 역할은 물론이고 좀 더 좋은 기회를 얻는 발판 노릇을 해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이후의 과정은 지극히 고단할 수밖에 없는데, 웬만큼의, 그러니까 굳이 배우를 해야 할 만큼의 연기력을 내놓지 않으면 대중에게 낙하산 취급을 받기 십상인 까닭이다.
이를 견디지 못하면 자의반 타의반, 도로 세계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고, 견뎌내어 살아남으려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을 따라 어떤 각고의 노력을 취해서라도 실력을 쌓아야 한다. 어떻게든 찾아올 하늘이 손을 내미는 순간을 제대로 낚아채기 위함으로, 이 때 중요한 부분은 초반에 어쩔 수 없이 쏟아질 사람들의 혹평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말로는 쉽지, 알다시피 쉽지 않은 과정이다. 수영 또한 연기를 시작하고 나서, 유명세로 좋은 배역을 꿰어 찼다는 비난의 소리는 둘째 치고, 웅얼거리는 말투와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대사 전달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비난은 비난이고 사실은 또 사실이니까, 제대로 배우가 되고자 한다면 고칠 것은 고치고 보완하여 연기력으로 증명해 보이는 게 옳았다.
“못할 것 같아요? 내가 못 하는 건 내가 안 했을 때밖에 없어”
이렇게 시작된 노력이 수영의 연기력을 결국 무르익게 할 즈음 맞닥뜨리고 움켜잡은 게 ‘런 온’의 ‘서단아’일 테다. ‘런 온’은 폐부를 찌르는 듯 섬세하고 구체적인 표현들로 이루어진 대사가 돋보였던 작품으로, 그만큼 각 인물 고유의 특성이 대사 곳곳에 실려 있어 배우가 이를 얼마나 제대로 소화해내느냐가 관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사의 양도 상당했다.
특히 수영이 연기한 서단아는 재벌가의 딸이나 그러한 배경에서 오는 오만함 대신, 콩가루 집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찍부터 제 힘을 길러온 데서 비롯된 자존감을 장착한, 일반적이지 않은 인물 유형이다. 그리하여 얼핏 상대방 기분 배려하지 않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 듯 보일 수 있으나 실은 누구보다 진실 되게 사람을 대할 줄 안다는, 이 미묘한 결들을 잘 살려주어야 해서 연기하기 쉽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수영은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서단아의 말들을 온전히 담아냄은 물론, 해당 캐릭터 특유의, 여타의 드라마가 으레 보여주곤 했던 재벌가 자녀들의 것과는 전혀 다른 맥락의 매력을, 세밀한 표정과 몸동작 등을 통해 고스란히 구현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결과 ‘런 온’을 보는 이들마다 수영의 서단아에게 빠져들고 말았으니, 덕분에 드라마가 종영한 후에도 여전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인물이 되었다.
캐릭터는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와 혼연일체가 될 때 한계가 주어진 작품 속 세계를 벗어나는 생명력을 얻는다. 실재하는 배우에게 깃들어 살아남는 것으로, 캐릭터 또한 인생 배우를 맞닥뜨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우로서 이토록 자긍심 충만한 순간이 또 있을까. 모진 선입견을 뚫고 와야 했던 수영에겐 더더욱 값지고 진귀한 성과였을 터. 이후에 또 다시 쌓아갈, 그러나 그 궤적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를, 배우로서의 수영의 행보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