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 개의 기록 #1
고등학교 2학년 무렵 단짝 C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기억으로는 당시, 에스프레소머신으로 만드는 커피가 대중화되기 전이어서 사 먹는 커피 자체가 익숙한 시절이 아니었다.
C가 일한 곳은 일본에서 갓 들어온 베이커리브랜드로, 쉽게 이야기하자면 카페형 베이커리였다 할까. 1층에서 산 빵을 2층에 올라가 먹는 구조였다. 빵과 기막힌 조합을 이루는 커피가 빠질 리 없고, 일정한 금액을 추가로 지급하면 내려 먹는 커피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커피와 나의 운명적인 만남은 지인찬스로 얻은 프리서비스 덕에 성사되었다. 고1에서 고2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관계를 단절한 나에게 친구라고는 C밖에 없었다. 하루가 멀다고 그녀가 일하는 곳에 찾아가 가장 저렴한 빵 한두 개를 사 들고 2층으로 올라가곤 했다. 그런 나에게 C가 유일하게 무료로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은 커피뿐이었고, 이때부터 나와 커피는 약 20년 넘게 깊고 깊은 애착 관계를 맺고 맺어가게 된다.
커피의 첫맛은 솔직히,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 맞닥뜨린 기분은 꽤 선명하게 남아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동경해 마지 않던, 스무 살 이상의, 낭만적인 어른의 삶이 커피 한모 금을 입에 무는 동시에 몸 안 가득 알싸하게 퍼졌다. 커피를 마시는 일에 중독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도 한몫했다. 그간 수없이 접한, 수많은 레퍼런스 속 작가들은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혹은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거나. 작가가 되려면 커피나 담배 중 하나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소심한 인간에겐 담배보다 커피의 진입장벽이 낮았고 운 좋게 매일 무료로 얻어먹을 기회 또한 얻었으니 그야말로 운명의 짝을 만난 게다.
그 이후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는, 나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공간이 되었다. 아무리 마음이 우울하고 어둑한 날이더라도, 한심하기만 한 자기 모습에 절망할 순간이더라도,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앞에 두고,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몇 줄의 글을 끄적거리면 어느새 나는 낭만의 한가운데로 튀어 올랐다. 그 옛날 상상 속에서 맞닥뜨렸던 가능성 충만한, 반짝반짝 빛나는 삶이 코앞까지 다가온 듯하여 어떤 상황이나 조건도 내 발목을 잡을 수 없으리란 자신감마저 생겼다.
계속, 계속 애정하다 보니 카페라는 공간에 대한 나름의 취향도 생겼다. 아무래도 첫 경험이 2층, 지상이어서 그런지, 지하에 있는 카페는 얼마나 잘 꾸며놨고 또 커피가 얼마나 맛이 좋은지에 상관없이 도통 마음이 가질 않았다. 커다란 창이 있어 밖이 보이고, 의자가 편안한 곳. 나긋하면서 단단한 심보를 가진 주인과 적절히 맛있는 커피, 그에 걸맞은 적절히 맛있는 디저트까지 있다면 금상첨화.
취향을 구체화할수록 완벽하게 마음에 들어맞는 카페를 찾기란 더욱 힘들어졌다만. 아는 사람은 또 알겠지만 찾는 재미가 또 쏠쏠하지 않나. 그렇게 찾아 근래 즐겨가고 있는 카페 두 곳을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우선 인디음악을 하는 아티스트가 운영하는 카페다. 낮은 빌라 형식의 건물 1층에 마련된 공간으로, 주인장이 선별한 음악들이 흘러나오는데 아름다운 가사가 조성하는 분위기는 이곳을 더없이 특별한 장소로 만든다. 그렇다고 부담스럽지도 않다. 주인장 개인의 성향이 워낙 느긋하고 느릿하여 카페에 발을 들이는 누구나, 거리낌 없는 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나 또한 그러한 성품이어서 반갑기 그지 없었다). 여기에 커피도 맛있어 단골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공원 앞에 위치하여 계절의 흐름을 만끽할 수 있는 멋진 창을 가진 카페다. 그 앞에 놓인 기다란 의자에 앉아 건너편에 있는 공원을 보고 있으면, 놓인 장소의 현실적 위도와 경도를 잊게 된다. 마치 현실의 경계를 넘어 어느 미지의 공간에 훌쩍 날라와 있는 것만 같은 느낌. 단골로 보이는 꽁지머리를 한 외국인과 마주 앉아 있는 날에는 더욱 그러하다. 물론 이곳 또한 맛있는 커피, 특히 수제 생크림이 올라간 비엔나가 인기다. 귀여운 곰돌이와 고슴도치 쿠키도 빼놓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