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2025 일요일

1차 시도 이전: 사회 초년생

by 윤준희

이 글은 "1차 시도: 희망은 어디에?"의 프리퀄 격의 이야기다.


난 94학번이다.


그리고, 내 학부 학과는 94년도에 만들어졌다. 즉 난 1기다.


교수들은 2학년때부터 임용이 시작됬는데, 지금 보면 그 당시 다들 35살 38살 짜리 혈기왕성한 박사들이였다.


대학원이 없었기 때문에 학부생들을 연구에 동원했는데, 따라서 2학년때부터 지도교수랑 같이 몇 프로젝트를 했다.


문제는 이 나르시시스트적 성향이 꽤 강한 지도교수가, 그때 그 스물한두살짜리 아이들에게 엄청나게 펌프질을 한 것이 문제였다. 마치 서플라이 체인, 비즈니스 프로세스 리엔지니어링 등 그당시 한참 핫했던 산업공학 Theme 들의 선두주자인것처럼.


철없던 시절, 삼성전자, 쌍용정보통신, 우체국, 그리고 몇몇 기업들 교수따라 다니면서 무슨 대단한 지식을 갖고 있는 양, 그것을 이제 한국에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을 갖고 있는 양 4년을 보냈다.


그래서 졸업 후 목표는 분명했다. 병역특례 회사에서 3년 경력도 쌓고, 그간에 열심히 돈을 모아 유학을 간다.


유학 다녀와서 교수를 하자. 내 학부 지도교수처럼. 멋모르고 살던 그 당시에는 이런 정도의 영웅이 없었다. 나에겐.


4년 후 98년에 바로 졸업했다.



형처럼 산업기능요원으로 병역특례를 할 생각이였다.


정보처리기사 2급도 부랴부랴 따놨다.


모교에서 석사를 하지 않으면 모교로 돌아오기 힘들거라는 교수의 권고인지 경고인지 애매모호한 말을 흘려듣고 진행했다. 사실 석사 졸업 후 전문연구요원은 5년짜리라 너무 늦었다. 지나고 난 지금 보면 그렇게 늦었다고 볼 수도 없지만.


문제는 97년에 IMF 금융위기가 터진 것이다.


내 별로 순탄하지 않은 사회적응기의 시작이였다.


군필자 취직도 거의 막힌 마당에, 병역특례 취직이라니, 이건 시작부터 난항이였다.


나름 명문대 출신이라고 연봉이 문제지 취직은 문제없었던 90년대 중후반을 지나오면서, 처음 겪어보지 못한 현실의 벽을 느낀 것이다.


몇 군데 채용공고 나온 곳에 원서를 넣으려고 전화를 하면, 몇 인사담당자가 지금 우리 인력 감축 중입니다,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분명히 지금 내 지도교수는 이력서에 우리가 한 프로젝트들 써놓으면 취직이 문제가 아니라 모셔가느라 안달일 것처럼 호언장담을 했던것 같은데,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 뭘 했는지, 뭘 아는지 뭔지 이런건 크던 작던 어떤 기업의 누구도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내 형은 2년 터울인데 별 문제없이 산업기능요원으로 취직해서 회사 다니고 있었고.


결국 나는 지도교수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도교수는 프로젝트 한번 같이 한 적 있던 중규모 IT회사에 나랑 내 동기를 소개시켜줬다.


이게 공식적인 내 직장생활의 시작이였다.


6개월의 수습기간. 세후 98만원 월급의 2/3를 수습기간동안 받는다.


이 회사는 응암동에 있었다.


그당시 IMF위기 이후 벤처기업 붐에 따라 급조된 IT업체들이 테헤란로에 있었던걸 생각하면 참으로 묘한 위치라 할 수밖에 없다.


집에서 버스를 한번 갈아타고 가면 - 지하철은 근처에 가지도 않았다 - 그 감자탕으로 유명한, 미친듯이 매운 고추랑 같이 주는 그 동네에 도착한다.


대략 80년대에 지어진 전형적인 상가건물의 4-5층을 썼던것 같다.


회의실 블라인드를 걷으면 보이는 건너편 산자락의 달동네들.


1층에 은행이 하나 있었던것 같고, 지하엔 우리 회사에 점심을 공급해주는 밥집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맨날 망하고 또 망하는 조그만 마켓 하나.


처음 자리에 앉아서 컴퓨터를 켰는데 - 물론 인터넷도 되지 않았다 그 당시엔 - 그 14인치 브라운관 모니터가 아무리 뒤의 knob들을 돌려도 화면 양 옆이 오목하게 파인다. 그당시 하드 디스크 사이즈가 120기가였던것 같다. 램은 4기가. CPU는 펜티엄.


이 회사 딱 두달 다녔다.



알고보니 병역특례를 현역 1명 티오, 방위 1한명 티오를 받은것이였다. 나랑 내 동기는 다 현역이였고.


내 보스격 되는 6-7명 정도 사장이 심혈을 기울여 뽑은 인원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나보고 나가야 되겠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너무나 얼떨결에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수습할 새도 없이 2달만에 잘린 셈이 됬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다시 지도교수에게 연락했다.


매우 고맙게도, 회사를 하나 더 연결해줬다.


그당시 목동에 살았는데, 그 새 회사는 테크노마트에 있었다. 광진구 구의동. 거의 서울시에서 줄을 그으면 가장 먼 두 포인트라고 볼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됬지만, 이 회사는 조폭이 만든 회사였다.


그 당시에 법인세 감면 혜택을 노리고 많은 기업들이 제조업이나 정보통신업체를 계열사에 끼워넣었는데, 그런 회사였던 것이다.


실제로 조폭 사무실도 테크노마트 어딘가에 있었는데, 주로 상가 번영회 등을 사측에서 견제할때 쓴것 같다.


엘리베이터를 한번 이 친구들이랑 같이 탄 적이 있다. 모든 대화 문장을 욕과 조사만 써서 한다. 그게 가능한지 아직도 신기하다.


그리고, 그 구의동 주변에 있던 비실비실하던 업체 하나를 인수해서, 거기 있던 병역특례 직원 3명 추가해서 4명의 병특 인원과 정보통신이랑 사실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던 사람들을 모아놓고 비즈니스라고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그 3명의 티오는 전 회사의 티오를 갖고 오는거라 문제가 없었는데 내 티오는 신규 티오라 문제가 되었다. 그 회사는 병역특례 업체가 아니였다.


따라서 그 회사의 다른 병역특례 티오를 갖고있는 무슨 ATM 오퍼레이팅 시스템 만드는 회사의 파견직 형태 티오를 갖고와서 내 자리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감사해야 할 일인지 분개해야 할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이렇게 내 생애 두번째 회사 생활이 시작됬다.


이 회사는 그래도 비교적 수습이던 연봉이던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3개월에 세후 110만원이였나. 다만, 돈을 못 버는게 문제였을 뿐.


4-5가지 정도 아이템을 갖고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내 보스는 그 중에 하나 아이템을 추진하는 사람이였다. 자체 광섬유 라우터랑 전용망을 깔고 테크노마트 내에 입주업체에 인터넷 서비스 하는 그런 거였다. 물론 내가 했던거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


8시인가 근무시작이였던것 같다. 6시 반 정도에 집에서 나온다.


목동에서 구의동까지 가려면 버스타고 당산역 가서 2호선 타고 구의역까지 가는거였다. 한번 배가 무지 아팠는데 지하철에서 참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그당시 여느때 한국 회사들처럼, 일이 있던 없던 돈을 벌던 못벌던 무조건 근무시간후 최소한 2시간은 더 일하는게 기본이였다. 그것도 진짜 야근이 없을 경우.


그 회사에서 약간의 네트워크 지식 - 다 까먹었다. - 그리고 유닉스/리눅스 운영방법 - 이건 향후 쏠쏠히 잘 써먹고 있다. - 이런거 배우고 다녔다.


내 보스가 나갔다. 몇달 후에.


그리고 그 위 임원도 나갔다. 몇달 후에.


그리고 병역특례 직원들 전부 잘렸다. 몇달 후에.


경영부진. 대략 7개월 다녔다.


졸업하고 9개월만에 두번 잘렸다.


그 날 파견했던 회사 임원이 나를 불렀다. 그 회사도 대단히 희한한 동네에 있었는데 기억이 안난다.


날 거둬주겠다 한다.


그런데 내 월급 110만원은 아무리 봐도 용납할 수가 없단다.


군대 대신 다니는건데 무슨 대졸 신입 월급이냐. (이건 법적으로 보장받도록 되어있는 내용이였다. 대졸 신입에 준하는 연봉을 오퍼해야 한다고.)


하긴 내 지도교수도 그당시 만연했던 대학원생 학부생 연구원으로 등록시켜 프로젝트 진행하면서 통장 만들고 프로젝트 급여 본인이 다 가져가던거 당연하게 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엿튼 이 임원은 30만원을 불렀다.


나는 나가겠다 했다. 새 회사를 찾겠다고. 그러니 안된단다. 나를 업무 불이행인지 뭔지로 자르겠단다. 그럼 군대 가야 한다.


또 곤경에 처했다.




이번엔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엄마 회사도 병역특례 회사였기 때문에 엄마도 사정을 잘 알았다.


참고로 병역특례는 사업주의 직계 가족은 그 회사에 취업할 수 없다.


엄마가 그 임원에게 전화 한통 하면서 상황은 종료됬다.


엄마를 사회의 일원으로서 고맙고 존경하게된 사건 중 하나였다.


자 그럼 이제 새 회사를 찾아야 했다. 어디로 갈 것인가.


그 응암동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다시 오라고.


경영상의 문제로 직원을 방출해야 하는 경우에는 병역특례 직원은 자기 티오를 가지고 다른 병역특례 회사를 갈 수 있다.


전화위복인가.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 즉 국방부 시계는 흘렀다. 98년 2월부터 멈추지 않고 36개월을 향해.


그래서 쾌재를 불렀다.


문제는 급여에서 터졌다.


다시 줄어든 급여, 그리고 6개월 다시 시작되는 수습기간, 그리고 처음 한달 반은 그마저도 못 받았다. 병무청 처리가 늦어져서.


98년 2월에 내 몸무게는 대략 98킬로 정도 됬다. 98년 9월엔 78킬로 정도가 됬다. 직원들이 못알아볼 정도였다. 이 개고생의 최대 수확이랄까.


그 때 남아있었던 동기는 - 내가 어디에서 무슨일을 했던지간에 - 날 다시 신입으로 취급하려 했다. 그래서 소리 몇번 지르고 끝냈다. 생각해보면 그 이전까지 과에서 가장 친했는지 라이벌이였는지 약간 애증관계 비슷한 친구였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친구에서 동기로 바뀐것 같다.




98년 9월부터는 비교적 순탄한 직장생활이였다. 드디어.


내적으로는 좀 많이 바뀐게 있었다.


그 이전에 전혀 신경쓰고 다니지 않았던 옷도 신경쓰기 시작했다. 일도 좀 더 주도적으로 하려고 하고, 팀 내 혹은 팀 간 관계도 원만하게 가지려고 노력했다.


99년 여름에 훈련소를 갔다. 양구 2사단에서. 거기서 싸이월드 창업자랑 같이 훈련 받았다. 그것도 추억이랄까.


CPIM이라는 미국 서플라이 체인 자격증도 하나 따고, 3년차부터는 유학 준비도 시작했다.


그리고 3년차 막바지에 사랑의 스튜디오를 나갔다.


고진감래랄까.


물론 카메라가 앞에 있으니 정신이 하얘져서 문제를 하나도 못 풀었다던지. 내가 부른 노래가 통편집되었다던지, 개그맨 윤** 이 스튜디오 밑에서 내 춤추는 거 보고 저놈 뭐하는거냐고 가슴을 치던거랑, 결국 사랑의 작대기 하나도 못 받은거 이런건 뭐 웃으면서 넘겨주자.


내 브로드캐스팅 징크스는 사실 국민학교 시절 "모두모두 잘한다", 즉 장학퀴즈의 초딩 버전에서부터 시작한다. 예선은 가장 잘한 5명중 하나였다나, 그런데 실제 방송에서는 당당하게 꼴찌를 했다. 여담이고.


매경 티비에도 한번 나왔는데 그건 뭐 기억도 안난다.


엿튼 돈도 1500원짜리 점심 떡라면으로 때우고 이외의 모든 돈 다 유학자금으로 모으고 GRE보고 TOEFL보고 유에스 뉴스 월드 리포트의 산업공학과 대학원 랭킹 1위부터 10위까지 멋모르고 쭈욱 지원하면서 내 사회 초년생 시절은 마무리됬다.


이때가 2001년 3월 말.




그 때 부터 지금까지 남아있는 몇 가지 라이프 레슨이 있다.

- 공부 잘하는 능력은 전체 능력의 30% 정도이다.

- 회사는 내가 충성을 바치는 곳이 아니다. 소속감을 주는곳도 아니다.

- 회사에 있는동안은 밥값을 해라. 다만 그렇다고 내 자리가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다.

- 대학교 교수 말은 대학교 내에서만 들어라. 그 밖에서는 별 소용 없다.

- 내 직업은 내 직장과 다르다. 일을 쌓는게 아니라 커리어를 쌓아라.

- 진정 필요한 인간관계는 친한 관계랑 상관없다.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느냐가 중요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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