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4/2025

1차 시도 이후, 2차 시도 이전: 방황

by 윤준희

2003년 5월.


탈탈 털린 정신을 질질 끌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학부시절, 병역특례 시절의 모든 꿈이 산산이 깨졌다.


새로운 꿈을 다시 세워야 힘이 날 텐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뭔가 설레는게 있던것도 아니고,


다만 미국이라는 절망의 도가니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더 있을 방법도 없었고.


어쨌든 군필은 됬고, 유학도 다녀왔으니, 면접을 봐야지.


삼성전자 두군데 사업부랑 IT 컨설팅 업체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대규모 조직과 그 분위기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소규모 조직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것도 있고, 그 높은 자유도를 좋아한다.


사실, 소규모 조직이 더 오피스 폴리틱스가 판을 치긴 하지만.


엿튼 그 컨설팅 업체가 연봉이 높길래 글로 갔다. 어쨌든 이 회사도 삼성전자에서 일하는건 마찬가지였다.


병특시절 연봉때매 고생한것도 있었다. 그때에 비해서 보너스 포함 3배의 연봉이였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삼성전자 사업부는 하나는 수원, 하나는 천안이라 출퇴근 문제도 있었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동료들이, 삼전 직원들이, 모두들 나를 대하는 태도가 병특시절과 너무 다른 것이였다. 불과 2년 사이에.


병특 말기에는 그래도 나름 긍정적인 바이브가 있는 직원으로 보였던 것 같다고 확신한다.


질시, 견제, 뭐 이런게 아니다, 없던것은 아니지만.


내가 희한할 정도로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뭔가 대단한 성과를 올려도,


뭔가 이상한 사람으로 카테고라이즈가 되기 시작했다.


특히 동료들에게서 그런 모습들이 두드러졌다. 삼전 직원들은 원만하게 지내긴 했지만.


심지어는 무슨 감시요원 같은 동료를 붙여놓고 그 인간이 쫓아다니면서 나에게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걸 시킨 사람도 누군지 안다. 나중에 논쟁 여러번 벌였지만.


어쨌든 나는 주어진 일을 한다. 정확히, 빨리, 등등.


중요한 점은 그게 주어진 일을 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라는걸 머지않아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공부한것, 그리고 그 서브젝트에 대한 어프로치는 흔히 사일로 혹은 버티컬이라 부른다.


말하자면 전문가다.


미국 회사, 그리고 산업은 "문제 해결" 이 중심이다.


대단한 문제를 해결하라는게 아니다. 눈 앞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단히 실용적이고, 깊고, 폭이 좁다.


내 문제 해결 능력,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했을 때의 부가가치가 나의 밸류가 된다.


그럼 이러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어떻게 기업을 운영할까?


이런 조직들은 풋볼팀처럼 운영이 된다.


각각 파트 전문가들이 코치 한명 두고 목적을 달성하고 보수를 받는다.


목적달성이 어렵다? 그러면 헤쳐모여 한다. 다른 회사로. 비슷한 회사에서 비슷한 일은 비슷한 플레이어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직이 쉽고, 커리어 개발을 위해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은 어떨까?


한국 기업, 산업 등은 내가 보기로는 군대-공장이다.


한국 기업이라고 문제가 안 생기겠나? 문제 해결 어프로치가 대단히 다르다. 말하자면 군대식이다.


군대에서 문제가 생길때 어떤식으로 해결하는지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먼저 노동 시간으로 해결한다. 그래서 그런 노동력 제공 포지션에 있는 사람들이 주요 희생 대상이다.


그게 안 될 경우에는 자본으로 해결한다. 사람을 더 투입하던, 기계를 더 투입하던 등등.


조직이 커지니 매니지먼트가 안된다? 컨설턴트를 고용한다. IT시스템을 설치한다.


그게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지, 거기서 어떤 부가가치가 나오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미 조직 구조 자체가 부가가치 창출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 장부 상 개선점을 찾는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수치적 개선점보다는 당장 써보니 좋더라 식의 편의성이 주로 개선점으로 강조된다.


그리고 그 조직의 생명은 팀장-임원 등 매니지먼트의 조직 이익 수호에 의해서 결정된다. 성과가 아니라. 성과는 어차피 다 하나마나 다 비슷하다.


자 그럼 공장은 어떨까?


실적이 있어야, 이윤이 나야 기업이 유지가 되니. 즉 실적은 생산량과 생산 비용에 의해 결정이 된다.


문제는 이러한 시스템의 부가가치는 필연적으로 낮아질 수 밖에 없다. 단 한가지의 예외를 빼고. 독과점화 될 경우. 내가 프라이싱 파워가 있을 경우이다.


따라서 한국 대기업들은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에서 독과점을 달성한 기업 - 삼전, SK, 현대차 - 들을 제외하면 미국 기업들에 비해서 자본 이익률이 턱없이 낮다. 당연하게도, 물건은 규모의 경제를 이룬 이후 이코노믹 인컴은 생산량이 늘 수록 0 에 수렴한다.


이것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근본 원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시스템의 원조 격인 일본 기업들이 90년대 이후에 30년간 이러한 한계를 극복한 듯이 보인다. 아직 더 두고봐야 하지만.




여하간, 여기서 깨달은 점이 있다.


2년동안 난 변했다는 점이다. 아주 많이. 그 개고생을 하면서.


어떻게 변했나? 나도 모르게 미국에서 배운대로 마인드셋이 미국식 어프로치로 재탄생된 것이였다.


다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학부를 갔다.


옛 학부 동기 대학원생들, 교수님들 하는것들이 이상하게 보인다.


마치 프로젝트 하나 하면서 세상을 구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논문이 "이래야 할 것이다" 라는 폴리시 임플리케이션으로 끝이 난다. 저자가 문제를 해결하는게 아니라 문제를 네가 해결하라는게 결론이다. 이런게 아카데미 논문인가? 컨설팅 페이퍼나 연구소 리서치 페이퍼에 더 가까워 보이는데?


교수가 자기 밤늦게 연구실 왔는데 대학원생들이 없다고 핀잔을 준다. 교수들의 프로젝트가 컨설팅 업체와 별반 다를게 없다. 다른점이 있다면 대학원생들에게 돈을 받고 일을 시킨다. 컨설팅 업체는 직원에게 돈을 주고 일을 시키지만.


결국 저가 노동력을 어떻게 확보하고 유지하는것이 한국에서 살아남는 길이였다는 결론은 내렸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게임의 룰이 이렇게나 달랐구나.



방황이 시작됬다.


나는 제일 힘든 순간 똥을 끊고 온 것처럼, 반쯤 구워진, 한국이나 미국이나 서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차라리 미국을 가지 않았더라면 아예 이런 괴리감을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미국에서 버틸 수 있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2004년 중반기 정도에 이런 갈등이 극에 달했던 것 같다.


위의 그 컨설팅 업체 사장이랑 많은 논쟁을 벌였다.


도데체 뭐가 문제냐. 잘 돌아가지 않냐.


그 사람은 문제가 문제가 아니였다. 그 문제 밖의 문제가 문제였지. 사일로식 어프로치는 한국에서 통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일 이외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의전 이라 하나 이런게 너무 많다. 그런게 실제로 매출을 이끌어 주니.


그럼 난 어디로 가야 하나.


이미 미국에선 한번 접었다. 한국에서는 갈 길이 안보인다.


텍사스 시절과는 다른 형태의 좌절이였다.




솔직히 답이 없었다.


내 영웅이였던 내 지도교수는 미국에 다녀온 이후에는 더 이상 아니였다.


이 사람이 주는 조언이라는건 한국에서는 잘 통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말들이였다.


결국 내가 가진 것들 - 코어 스킬, 마음이 가는 것들, 라이프 스타일, 등등 - 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엄마랑 이 시기에 많은 대화를 했던것 같다.


어떻게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지는 모르겠으나. 난 다시 미국에 돌아가기로 했다. 박사 과정으로.


1차 시도 때의 실패를 곰씹어 보았다. 뭐가 문제였는지. 개선해보자.


첫째, 최대 실패 요인은 학부 지도 교수의 영향이였다. 미국 학교에서 한국에서 각광받는것을 하려 하니 애초에 맞지 않는것은 당연했다. 싹 무시하고 백지에서 다시 시작한다. 미국식으로.


둘째, 박사 이후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때만 해도 학계에 대한 생각이 없었던것은 아니지만, 금융사에 취직하는것을 중점으로 하되, 차선책으로 학계 옵션도 놓지 않기로 했다.


셋째, 전공은 금융공학으로 하기로 했다. 그 때 이미 학부 시절 핫 했던 서플라이 체인 매니지먼트, 매니지먼트 인포메이션 시스템, 비즈니스 프로세스 엔지니어링 등 분야는 가라앉기 시작했던 때이다. 보통 미국에서 과가 통폐합되거나, 대학원 진학이 확 줄기 시작하면 보통 유행이 지났다고 보면 된다. 나중에 박사 졸업 때에도 문제가 됬지만, 박사 같이 최소 4년 정도 걸리는 과정은 입학때 전공은 이미 전성기가 지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였던것 같다.


넷째, 한국엔 돌아오지 않는다.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텍사스에서의 부작용이 워낙 심했던 시절이긴 했어도, 그 부작용 만큼이나 내 스스로가 얼마나 변했는지 간과했다는걸 한국에 와 보고야 알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민이란?" 글에 상세히 적어 놓았다.


다섯째, 레드 스테이트는 피한다. 텍사스의 그 대학교가 골수 공화당 지지자들, 지금은 MAGA 지만 그당시에는 네오콘이나 티파티로 불린 사람들의 성지 비슷한 곳이였다. 이 당시에 놀러갔던 보스턴이나 뉴욬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레드 스테이트 사람들이 갖고있는 제노포빅을 체감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래서 백인들이 대다수 몰려있는, 특히 공화당 지지자들은 가급적이면 피하는 편이다. 학교도 가급적이면 그 지역에 있는 학교는 피해서 지원한다.


회사는 11월에 퇴사한다고 통보했다. 돈도 조금 그간에 모아 놓았다.




이번에는 박사 지원을 많이 하지 않았다. 7군데 했나. 위의 레드 스테이트를 최대한 피해서.


11월부터 유학 준비를 제외하고 그냥 놀았다. 정신적 데미지가 너무 컸는지, 엄마가 그냥 쉬는게 좋겠다고 했다.


재밌는건, 아니나 다를까 리젝션 이멜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한군데 남고. Univ. of Florida. 지금은 레드 스테이트이지만 그때는 퍼플 쯤 됬다. 신기하게도, 여기는 아예 연락이 오지 않았다.


6월달이 되어서야 왔다. 보통은 2-3월에 오는데. 어드미션 주긴 하겠단다. 스티펜드 없고. 그냥 내 돈 태우면서 오란다.


예전 같았으면 또 좌절에 빠졌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미 어느정도 단련됬다. 내 스펙이던 능력이던 뭐던 모잘랐나보지뭐. 그래서 어쩌라고. 난 내 갈길 간다.


I-20를 안 보낸다. 이 망할 학교가.


그래서 한달 정도 애 태우는 기간을 보내고, 서류 받고, 비자 인터뷰 하고, 등등, 다시 미국으로 출발했다.


이번엔 게인즈빌 플로리다.


이 때가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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