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5/2025 토요일

2차 시도: 돌파구

by 윤준희

2005년 7월.


텍사스랑 별반 다르지 않은 뜨겁고 습한 날씨.


지평선이 훤히 보이는 평평한 대지까지 똑같다.


컬리지 스테이션이랑 거의 같은 사이즈의 게인즈빌 공항.


케어해주기로 한 분이 고맙게도 기다리고 있다.


그분은 오늘 같은 비행기로 오기로 한 분을 더 기다렸다.


지금도 종종 연락하는 그 형과의 만남이였다.


너무나 익숙한 이 미국 남부의 공기.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다.


은행 계좌 열기, 전화 개통하기, 중고차 구매하기, 아파트 잡기 등등. 한번 해보았던 것이라 수월했다.


텍사스 초반기 차를 샀어도 운전면허가 없어서 전전긍긍했다면, 지금은 도착한지 일주일도 안되서 차 사고 그 형이랑 돌아다니면서 정착을 마무리했다.


학교도 텍사스 대학이랑 크게 다르지 않다만, 약간 더 컴팩트한 느낌이다.


게인즈빌은 컬리지 스테이션보다 훨씬 더 도시 같다.


갑자기 즐거워졌다.


무엇보다도, 미국인들이 다르다.


컬리지 스테이션에서 본, 외국인이기 때문에 가면 안되는 곳이 있다던가, 몇몇 미국 학생들이 뭔가 아니꼽게 쳐다보는 느낌, 이런 느낌이 어느 누구에게도 없었다. 마치 보스턴이나 뉴욬에서 본 미국인들 처럼 스스럼 없는 느낌.


돌아온 보람이 있었다.




지도교수를 만났다.


금융공학을 하는 교수가 산업공학과에 두 명 있었고, 그 중의 하나다.


금융공학 전공은 Multidisciplinary program이다. 즉슨, 산업공학, 통계학, 수학, 파이낸스 네 학과의 협동 과정이다.


알고 보니, 이 전공으로 한국인이 한 명 더 있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예일대에서 통계 석사 하고 스콜라쉽, 즉 전액 장학금으로 왔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도교수도 같았다.


긴장했다. 난 내돈 태우면서 왔는데.


또 하나, 산업공학과에 내 고등학교 동창이 석사 과정으로 있었다.


1년 일찍 왔다 이 친구는.


한인 성당에 갔다.


컬리지 스테이션에 비해서 한국인 숫자는 반 정도밖에 안되는것 같지만 - 그 당시 텍사스 A&M이랑 오하이오 스테이트가 한국인이 가장 많은 학교였으니 당연한 얘기다. 지금은 아니지만. -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졸업하고 정착한 사람이 많았다. 취직해서.


놀라운 일이였다. 컬리지 스테이션은 주변에 회사 같은거 없다. 직장인은 세네명 있는 교수 혹은 교직원이 전부였다.


말하자면 이 동네는 정말 학교만 있는 동네가 아니였다. 말 그대로 작지만 도시의 기능을 하는 동네였다.


이 게인즈빌과 학교가 갑자기 좋아지기 시작했다.




마음 단단히 먹고 학기를 시작했다.


텍사스 시절을 반면 교사삼아, 스스로를 의지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공부를 시작했다.


1년차는 코스웤이 전부다. 리서치는 없다.


2년차에 제네럴 이그잼, 즉 첫째 시험이 있다. 필기 시험인데, 말 그대로 모든것을 갈아넣어서 보는 수학시험이라 보면 된다. 사실 내 전공과는 그닥 맞는점이 많진 않았는데, 어쨋든 산공과에 있으니 봐야 했다.


공부하면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예일에서 왔다는 친구 - 도통 공부를 안하는것 같다. 처음엔 천재인줄 알았다.


이 제네럴 이그잼이 어렵다는 얘기는 동료 박사과정 학생들에게서 누누히 들었기 때문에, 긴장 타고 있던 와중이였다.


기억이 안나는 무슨 수업에서 프로젝트를 하나 같이 했는데, 그때 알았다.


사실 충격이였다.


나처럼 병특 시절, 텍사스 시절, IT 컨설팅 시절까지 이리뛰고 저리뛰고 머리에서 단 내 나도록 공부하고 고민하고 진로 잡고 이런 치열함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그 프로젝트를 특별히 뭐 잘 했나? 뭐가 하도 안와서 전화해보니 쇼핑몰에 있었다.


분명히 예일 가고 스콜라쉽 받아서 왔다는데 왜 이리 엉망이지?


그럼 난 왜 이 개고생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스콜라쉽 못 받았지?


뭔가 얻어맞은 느낌이였다.


그 동기에 대한 원망은 사실 없었다. 난 저 친구랑 경쟁을 할 이유도 없고, 자기 갈 길 가면 그만이다. 나도 마찬가지고.


문제는 도대체 난 왜 이리 모든게 다 어려웠는지 이해를 할 수 가 없었다.



제네럴 이그잼을 봤다.


두 과목을 보는데, 산업공학의 가장 근본 과목이다. Linear optimization, and probability model.


한번에 다 통과했다.


Dr. Hearns, 그 당시 학과장이 날 불렀다.


들어갔더니 이것 저것 물어본다.


그러더니 스티펜드랑 튜이션 웨이버 해주겠다고 한다.


드디어!


나중에 알았지만, 박사과정 학생 중에 나만 스티펜드랑 튜이션 웨이버를 못 받고 다녔던 것이다.


아마도 6월에 어드미션이 온것도, 먼저 오기로 한 사람이 다른 학교 가면서 나에게 마지못해 준게 아닌가 싶다. 그것도 장학금 없는 옵션으로.


미국 생활 도합 3년 반만에 드디어 소득이 생겼다.


돌파구를 만든것이다. 드디어 개고생하고 물러나는 악순환의 고리를 깬 것이다!


텍사스 시절에도 사실 지도교수 (있었다!) 가 박사 해보겠냐고 했었다. 장학금은 없다고 했다.


그때는 전공 및 진로에 대한 혼란이 너무 커서 안 하겠다고 했다. 그 때 경영정보시스템 쪽 전공 비즈니스 스쿨에 14군데 지원했다 다 떨어진건 그 다음 얘기다.


어쨋든, 그게 트라우마 이던, 스티그마 이던, 석사 지원할때부터 나를 괴롭혔던 언더독 컴플렉스를 드디어 어느정도 메이크업 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 예일대 친구는 제너럴 시험 두 과목을 다 떨어졌다는 것을 내 지도교수를 통해 들었다.


이제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까지 안 풀렸는지, 그리고 그 친구는 왜 저모양인데 저렇게 잘 풀렸던 건지.


이 친구는 나중에 석사로 졸업하고 나갔다.




2년차부터 교수랑 리서치를 하기 시작하기로 되어있다. 그리고 협동 과정 답게 다른 학과에서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금융공학 교수 두명 중 내 지도교수 말고 다른 교수는 러시아 사람이였는데, 대단히 많은 러시아 친구들이 와서 박사를 하고 있었다.


내 지도교수는 나 오기 1년 전에 왔는데 그때 받은 인도 박사 학생 둘이 있었다.


이제 이 협동과정이 어떤 상황인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친구들로부터 얘기를 듣기 시작했다.


첫째, 내 지도교수는 알제리 출신이고 스탠포드를 나왔다. 블랙-숄즈의 그 마이론 숄즈가 창립한 회사에 다녔던 적이 있다. 이상하게도, 테뉴어 트랙이 아니였다. 컨트랙터 포지션이였다.


둘째, 그 러시아 교수는 러시아 학생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다. 한국 교수들처럼 학생 쥐어짜는. 그 교수 수업을 첫학기때인가 들었는데 도대체 뭘 가르치려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셋째, 실제로 학과 간 협동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각 과 별로 협동 과정 수업 리스트만 만들어놓은 상태로, 교수들끼리의 연구 교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즉슨, 학생이 알아서 협동과정 아젠다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였다.


넷째, 따라서 학생들은 결국 자기 지도교수 어젠다를 따라갈 수 밖에 없었고, 결국 타 과에 가서 듣는 수업들은 사실 그냥 기회비용이자 낭비가 되는 결과가 되었다.


수학과랑 통계과 수업은 무난했다. 텍사스 시절부터 많이 수강한 학과이기도 하고 가장 많이 들이판 분야이기도 했다. 다만 이쪽 교수들은 금융공학에 사실 별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였다. 통계는 아예 금융공학 관련 내용이 없는 몬티카를로 시뮬레이션과 그 기반 지식이 메인 이였고, 수학과는 금융수학을 가르치긴 했는데, 프랙티컬한 내용이 전혀 없는 마팅게일 이론, 컨티뉴어스 스토캐스틱 이큐에이션 같은 이론만 가르쳤다.


수업을 들어도 이걸로 어떻게 리서치를 할지 도무지 연결이 너무 힘든 내용들이였다.


정작 이상한 상황은 지도교수 수업에서 발생했는데, 난 내 지도교수 수업을 들은게 초반 2년 두과목 정도 밖에 없다.


그리고 이 교수는 나에게 리서치 디렉션을 안준다.


그리고 무슨 얘기를 하려거나 이론에 대해 얘기하려 하면 귀챦아하고 반응이 없다.


뭔가 대단히 쎄한 느낌이였다.


무엇보다도 지금부터 무슨 리서치를 하여야 하는가?




말하자면, 제너럴 이그잼을 붙은 순간부터 공중에 떠 버린 셈이 됬다.


지도교수는 지도를 안한다. 산업공학 수업들은 이제 더이상 내 전공과 상관이 없다. 통계과 수학과 수업들은 곧잘 했지만 리서치에 써먹을 수가 없다.


이 때 가장 나에게 희망을 주었던 학과가 파이낸스 학과였다.


나는 금융 관련 수업도 들은 적이 없고, 업계에 근무한 적도 없었다. 커리어 체인지인 셈인데,


도대체 뭘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장 서브젝트 매터를 잘 아는 학과가 당연하게도 파이낸스 학과였다.


문제는 이 파이낸스 학과 수업을 처음 들어갔을때부터 발생했다.


일단 분위기가 대단히 다르다.


산공과, 통계과, 수학과 수업들은 다 비슷하다. 수업-시험-프로젝트 순. 수업의 대부분은 중국, 인도, 한국, 유럽에서 온 박사 학생들이다. 대략 클래스 당 30-50명 정도.


파이낸스 박사 수업은 일단 15명 정도로 적다. 그리고 대부분 미국인이다. 텍사스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진짜 미국인들이랑 수업하기.


그리고 분위기가 연구실이 통째로 수업을 듣는것 처럼 교수랑 학생이 대단히 친하다. 수업 끝나고 저녁에 풋볼 경기 보러 자기집에 오라고 한다. 물론 자기 과 학생들만.


그것까진 뭐 상관없는데, 텃세가 있다. 처음 파이낸스 수업은 오버부킹이 됬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가야 한단다. 꼭 그럴까?


그런데 분위기가 다 날 쳐다본다. 넌 어디서 왔냐 분위기다.


그러더니 야구모자 눌러쓴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다 못해 워워워 이렇게 들리는 놈이 실러부스를 휙 던지더니 나간다.


쫄았다.




지금도 그 앤더슨 빌딩이였나, 게인즈빌 갈때마다 파이낸스 건물 지나칠 때면 소름이 돋는다.


그 불청객 대접.


텍사스 학교는 캠퍼스부터 동네까지 전부 다 불청객 대접을 했다면, 게인즈빌은 파이낸스 학과가 그랬다.


이건 분명히 뭔가 있었다. 비하인드 스토리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사실 파이낸스 학과가 나의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리서치를 하려면 주제를 잡아야 하는데, 산공과 통계과 수학과 어디던 도무지 오리무중이였다. 백그라운드 지식이 있어야 뭘 할것 아닌가.


파이낸스 학과에서 날 얼마나 싫어하던 간에 꾸역꾸역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파이낸스의 무슨 수업이 나에게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은지 전혀 몰랐다.


그래서 협동과정 실라부스에 나온 모든 수업을 다 듣기로 했다.


네 과목을 들었던것 같은데, 세 과목은 정말 도움이 많이 됬다. Asset Pricing Theory, Market Microstructure, and Econometrics. 사실 여기서 내 스킬셋부터 Dissertation까지 아이디어를 다 뽑아냈다. 정작 웃기는건 내 지도교수가 산공과에서 잘릴 때, 파이낸스의 논 테뉴어 포지션으로 들어왔는데, 내가 박사 논문때 써먹은 위의 분야를 자기 스페셜티로 써놓았다. 하나도 모르면서.


나머지 한 과목은 Corporate Finance였다. Univ of Florida에서 가장 연봉이 높은 스타 교수의 수업이였다. Jay Ritter 라는 사람인데, 가끔 CNBC에도 나왔다. 한국도 몇번 왔다. 지금은 Emeritus인것 같다.


이 수업은 정말 악몽 중의 악몽이였다.


위에서 느꼈던 그 불청객 분위기에 교수의 노골적인 냉대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더구나, 이 수업은 사실 내 전공이랑 사실 별로 상관이 없는 분야였다.


그걸 꾸역꾸역 들었다.


그리고 학기가 끝나고 이멜이 왔다.


"너는 B를 받을 자격이 없는데 학과 방침상 준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욕먹기. 하하. 내 특기다.


어쨌든 나는 내 목표를 달성했다. 저 Jay Ritter라는 저 놈은 더 이상 볼 필요 없다.


미국에서 배운 라이프 레슨 중의 하나였다.


인간관계는 거리조절이 전부다. 나를 좋아하냐 싫어하냐 갖고 마음 쓸 필요 없다. 안 맞는 사람은 떼어놓아라. 한국같이 좋던 싫던 좁은 공간에 붙어있어야 하는 - 고부갈등 같은 -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레슨이 사실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정말 많이 도움이 되었다.




코스웤이 끝나가던 3년차 초부터 지도교수가 어떤 사람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교수 회의를 하는데, 지도교수가 좀 늦게 들어가는 모습을 뒤에서 봤다.


그때 새로 들어온 학과장이 방 저 끝에 앉아있었는데, 그 얼굴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경멸이 가득한 얼굴.


나중에 지도교수가 잘려서 알았지만, 뭔가 와꾸가 맞는다. 이사람은 교수들 사이에서 눈밖에 난 사람이다.


따라서, 내 지도교수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본인이 받는 스트레스를 나에게 히스테리, 비아냥, 난데없는 비난 이런것들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산업공학에 맞지 않는 전공, 북아프리카-레반트 지역 사람들 특유의 뭔가 비틀린 성격, 저조한 연구실적 등.


내 1년 선배가 디펜스할때 통계과의 스타 교수 - George Casella - 를 어드바이저로 넣었는데, 뭐가 문제였는지 이 카셀라 교수가 내 지도교수에게 엄청 화를 냈다는 얘길 들었다.


뭐 좋다. 난 이젠 정말로 이골이 났다. 미국에선 Asshole 전담이 됬다. 어차피 이 사람에게 리서치 주제를 받을것이 아니기 때문이였다.


그래서 독고다이로 리서치를 시작했다. 파이낸스에서 받은 서브젝트 매터, 통계과에서 받은 프로그래밍과 확률 모델링, 이코노메트릭 수업에서 받은 데이터 어낼리틱들 갖고.


그래서 뭔가 만들어냈다.




Change-point 모델이라는, 별로 직관적이지 않은 이 이름은, 스토캐스틱 모델이다. 세미 스트롱 마켓 에피시언시 상황에서 코포렛 이벤트 발생 시 이벤트 정보가 어노운스 되는 시점과 주식 시장이 반응하는 시점이 같은가, 그리고 시장이 이벤트 이후에 프라이스 디스커버리 과정이 어떤 형태를 띄는가, 이런 내용이다. 파이낸스 리서치 페이퍼에서 주제를 따오고, 통계과 수업에서 배운 마코브 체인 몬테 카를로 기법을 쓸 수 있었다.


1년 반 정도 헤매다가, 한번 개념이 잡히니 기적처럼 내용을 잡아나갈 수 있었다.


내 지도교수는 비꼬기와 무시로 대응했다.


Dissertation Proposal 때가 왔다. 이걸 넘기면 ABD라 불린다. anything but defence였나. 한국에서는 아마 이때 이후부터 디펜스 전까지 박사 수료 라 불리는것 같다.


바지에 쉬야 할 뻔 했다.


이 분야에 관심이 있던 중국 박사 학생들이 와줬다. 잘 모르던 친구들이였는데, 지금도 고맙다.


의외로 스트레이트로 패스했다.


그 파이낸스 교수들은 관심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무심히 Congratulations! 하고 갔다.


그 수많은 밤샘, 두통, 좌절, 우울을 뒤로 하고, 이제 터널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만 나의 한계도 더 명확히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학계에서 고아다.


Lineage가 없다. 그냥 내가 혼자서 북적해서 만든 내용이다. 학계에서 별로 관심이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이 때 저널에 퍼블리시를 하기 시작이였으니 금방 알 수 있다.


내 지도교수는 문장 좀 손보고 인트로덕션에 몇줄 쓰더니 슬쩍 first author로 자기 이름을 넣어놨다.


처음으로 화를 낸것 같다. 그 교수에게. 그리서 퍼스트 오서로 바꿔서 탑 저널에 서밋 했다.


물론, 그 담에 탑 저널에 서밋 한지 하루만에 이런거 안받은 셈 칠테니 다시 보내지 말라는 referree의 이멜을 받고, 교수보고 마음대로 하라 했다.


이 때부터, 난 산공과도 못가고, 파이낸스도 못가는 공중에 뜬 존재가 되었다. 물론 내 능력이 부족해서였겠지만. 하하하.




디저테이션 프로포절이랑 디펜스 사이에는 6개월 - 1년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다. 따라서 프로포절이 실제 리서치의 마무리가 되고, 디펜스 전까지 잡 서치 및 디저테이션, 즉 박사 논문을 마무리한다.


수 많은 회사들에 지원하기 시작했다. 교수는 어플라이 자체를 하지 않았다.


텍사스 시절 이미 400군데 넘게 지원해서 떨어진 적이 있기 때문에, 리젝션엔 전혀 동요도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스티펜드-튜이션 웨이버 받고, 프로포절 통과 한 이후에, 텍사스 시절의 트라우마는 많이 극복했다.


문제는 엄마였다. 간암이 발병한 것이였다.


그리고 프로포절이 끝남과 거의 같은 시간에 금융위기가 시작됬다.


한국 같은 경우는 아무리 매일이 불경기고 IMF때보다 어렵다 해도 저녁에 번화가 가면 사람이 많고 평소처럼 사는것 처럼 보인다.


미국 같은 경우는 한번 불경기다 하면 사방에서 실업자가 넘쳐난다. 내가 살던 아파트에서 학교 캠퍼스 동남단 끝까지 대략 5마일 정도 거리였는데, 그 사이에 패스트푸드 점, 호텔, 각종 샵들 이런것들이, 금융위기 시작 이후 불과 몇달이 안되어 반 정도가 망하는걸 봤다.


어마무시하게 불안한 마음으로, 2009년 8월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집안 상황이 상황인지라, 엄마던 형이던 미국에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다. 고맙게도 성당 교우들이 꽃순이도 해주고 파티도 해주고 했다.


이런 저런 드라마를 거쳐, 결국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상세한 내용은 "가족사" 글과 "플로리다" 글에 적어놓았다.


결국 2차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외부 요인에 의해서.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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