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시도 이후, 3차 시도 이전: 과거는 과거에 맡기기
2009년 10월 정도였나,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한 금융지주사의 해외 인재 채용 프로그램에 지원했었다.
인터뷰를 꽤 오래 본 듯 한데 기억이 잘 안 난다. 어디서 봤는지도.
엿튼 수월하게 채용이 되었다.
다만 기증 수술 후 회복 된 이후에 일이 가능하였던 터라, 실제 일은 2010년 5월부터 시작했다.
난 누구고 여기는 어딘가. 원점으로 두번째 돌아왔다.
사실 이 금융지주사 리스크관리팀 일은 그닥 나쁘지 않았다.
다만,
주말에 단합대회 겸 가는 등산이나,
내돈 주고 가야하는 토요일 새벽 골프 라운드나,
11시가 넘도록 술 퍼마시고 자뻑하는 동료들 옆에서 아픈 엉덩이 비틀면서 바닥에 앉아있는거나,
가끔 별 희한한 욕을 해대는 은행 리스크관리팀 부장 얘길 듣고 있거나,
매일매일 정장을 하고 출근하는거나,
7시 반에 퇴근하면서 일찍 퇴근한다고 쾌재를 부르거나,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엄마가 다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내 인생의 일부가 같이 죽어가고 있었다.
최소한 1년 반은 다니기로 했다.
이건 스스로에게 주는 벌이다 라고 정의내렸다.
나의 독선에, 자만에, 절망에, 모르고 있는 잘못에 등등.
아침 러시아워에 지하철 역 환승 통로에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한다.
출근할때마다 팔뚝에 칼을 꽂는다.
누가 더 깊게 박았나, 피가 누가 더 철철 흐르나로 회사생활 잘 하는지 평가받는다.
그 당시 리스크관리팀은 77년생, 75, 74, 73, 72, 70, 68년생인가 이렇게 거의 년수마다 한명씩 직원이 있었다.
이미 병특시절, IT컨설팅 시절에 나름 단련된 한국 직장생활이다. 외려 그때에 비하면 나았다. 여러모로.
물론 직원들은 6개월 지나면 IT 컨설팅 시절처럼 반목하고 견제하고 등등, 빤히 보이는 대로 진행됬다. 다 내가 문제라 그렇다. 그러니 벌받자. 엄마도 점점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
엄마 장례식날. 회사 직원들이 왔다.
장례식장에서 고기만 7만원어치를 먹었다. ㅎㅎ. 큰이모가 지금 고기 계속 더 주문하는데 괜챦겠냐고 물었다. 더 시키시라 했다.
승화원으로 떠나는 날, 즉 발인 하는날, 보스랑 직원 두명이 와 주었다. 지금도 고맙다.
난 이제 꿈도, 지켜야 할 것도, 하고싶은것도 뭐도 다 없다.
그 순탄치 않았던 사회 초년생 시절, 텍사스 시절 고생, IT 컨설팅 시절 방황, 플로리다 시절 돌파구, 박사, 간이식도, 다 간신히 성공했으나, 결국 다 실패로 돌아왔다.
도대체 직장은 왜 다니고 숨은 왜 쉬며 하루하루 질질 끌려다니듯이 살아야 할까.
형하고 유산 상속 절차에 들어갔다.
엄마가 아빠가 갑자기 가신 이후로 보험을 여기저기 들어놓아서 그것 보험 청구하는데만 몇주일 걸렸다.
이때 진정으로 놀랐다.
난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엄마의 재산이 얼마인지 전혀 몰랐다. 관심도 없었고.
빚이 많다는것만 알았다.
아빠가 돌아가셨을때, 엄마가 사장실에 앉아있으면 아빠 찾으러 오는 사람들은 다 빚쟁이밖에 없다고 엄마는 자주 불평했다.
그래서 엄마 재산은 언제나 마이너스 순자산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빚은 2006년인가에 이미 다 갚았다. 그리고 상당한 재산을 남겨놓고 가신 것이다.
사회 진출 후 내 모든 관심사는 박사까지였다.
그 이후에는 제이피 모건에 들어가는게 목표였다. 퀀트로서. 파크 애비뉴, 맨하탄, 뉴욬에서.
그래서 가난한 유학생 답게, 돈을 써 버릇 한 적이 없다.
IT 컨설팅 시절에 좀 이리저리 써 봤는데, 별로 감흥은 없고 돈이 아깝기만 해서 안 쓰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상당한 재산이 들어왔다.
그렇다고 이것만 가지고 먹고살기에 지장 없는 그정도로 많은건 또 아니다.
게다가 아빠 엄마의 모든 인생이 녹아있는 재산이다.
돈쓰는거 안 좋아하고, 재산은 일찍 돌아가신 분들이 남기신거라 부담스러우며, 앞으로 살아갈 길도, 힘도, 의지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 근처에 오피스텔을 하나 잡자.
지금 재산을 잘 투자해서 현금흐름을 뽑아내면,
대략 아주 근근히 살 만하다.
그럼 남은 평생 오피스텔에서 게임이나 하다가 답답하면 바닷가나 쏘다니자.
어차피 인생은 개고생하다 병들어 죽는거다.
이런 인생을 후세에 넘겨주는건 다음 세대에 죄짓는거다.
최소한 개고생은 하지 말고 죽자.
새로운 옵션이 하나 생겼다.
그리고 다른 길이 무엇이 있을까?
이래저래 다 안되면 최악의 케이스는 서귀포 오피스텔이라 치자.
이미 역 문화 충격은 텍사스 귀국 시절 다 겪었기 때문에 이번엔 뭐 크게 겪진 않았다.
그냥 모든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산듯이 죽은듯이.
그러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귀포냐 결혼이냐.
결혼은 물론, 그냥 한국에 정착을 전제로 하거나 뭐 이런게 아니였다.
사실 박사 이후에 어떠한 종류의 장기 전략을 세우는걸 그만 두었다.
어차피 안되니까!
석사, 박사, 엄마 간호 등으로 계속 미뤄진 결혼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한번 만나들은 보고 결정하자고 시작한 프로세스였다.
8번째 소개팅이였나, 사실 이것도 질려서 그냥 관두려 했다.
지금 와이프를 소개받았다. 사촌 누나에게.
최근에 호주에서 온 친구가 있는데 지금 성당 남자들이 파리마냥 꼬이고 있다고.
그럼 한번 보자고 했다.
그때가 2012년 5월 13일일거다. 분당 정자동 브런치바에서, 10시 약속이였나,
이 여자는 20분인가 늦게 나왔다. 그 당시 나에게는 엄청난 레드 플렉이였다. 용납할 수 없었다.
어쩌겠냐. 그래서 그냥 쭉 무심하게 읊었다. 난 누구고 어디서 왔고 뭘 하고 등등.
그게 와이프에겐 대단한 충격이였나보다. 지금도 그 얘기를 한다.
소개팅 첫 자리에 그렇게 자기소개를 하는게 너무나 황당했다고.
뭐 어쨌든, 난 지쳤다.
난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랑/연애에 관련된 노래/영화/예술 이런 것들에 전혀 공감이 안된다.
몰입도 안되고, 이해도 안된다.
INTJ의 최대 약점이 연애라는 글이 있던데, 그래서 INTJ 남자들 와이프들이 다 못생겼다는 둥, 특히 INTJ가 많은 교수들 와이프들이 하나같이 박색이라는 둥 이런 말들이 많고, 어느정도는 사실이다.
다만, 내 와잎은 상당히 미인이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와이프가 일생일대의 실수를 한 것일까.
엿튼, 와이프는 호주 시민권자다.
95년에 가족 전체가 뉴질랜드로 이민갔는데, 와잎만 2001년인가에 대학을 시드니로 와서 어떻게 시민권 받고 정착한 것이다.
아무리 봐도 호주에서는 미래도, 남편감도 안보여서 한국에 왔단다. 2011년 말이였는지 2012년 초였는지.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유학생 시절, 험난했던 사회 초년생 시절, 외국인으로서 홀로 정착하는 외로움과 괴로움 등, 많은 부분에서 공감이 됬다.
그리고 호주라는 나라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초기 정착비용은 내가 지주사 다니면서 모아놓은 돈만으로도 커버가 가능할듯 했다.
호주라면, 영어 쓰고, 미국 학위가 먹힐것 같았다.
와이프에게 넌지시 플랜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호주에 결혼해서 재정착하자고. 호주 은행이던 펀드사던 금융업에 취직하면 한국보다 살기 더 낫지 않겠냐고.
사실 2년 8개월 정도 이미 그 지주사를 다닌 상태였다. 금융공학 박사 학위도 있었다.
학력이나 경력도 갖추었으니 왠지 호주에서는 한국보다 더 일관성 있는 커리어를 가져갈 수 있을것 같았다.
박사 학위는 사실 직장에는 큰 도움이 안된다. 양 방향으로. 회사는 리서치를 하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다. 회사 일에 내 박사과정에서 얻은 지식이 직접적으로 부가가치를 주지 못한다.
한국에 그렇다고 퀀트 잡이 많지도 않았을 뿐더러, 있다손 치더라도 금융위기 이후에 퀀트와 금융공학은 더 이상 미래 산업이 아니였다. 위기의 주범일 뿐이였지.
미국만큼은 아니더라도, 호주는 그냥 남반구에 위치한 미국 아닐까. 따라서 잡 포지션도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퀀트 잡도 한국보다는 더 잘 자리잡았을 것이고.
갑자기 인생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모든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한 것이다.
12월 8일 2012년에 결혼하고, 다음다음날 시드니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