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1/2025 금요일

3차 시도: 이민병

by 윤준희

2012년 12월.


와이프랑 호주에 왔다.


와이프는 호주 이민법무사다. MARA Agent라고 하나.


미국에선 이민변호사라 불리는, 이민 비자 처리해주는 일을 한다.


따라서 수 많은 이민병 환자들을 만나왔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민병 걸린 남자를 만나 다시 호주로 돌아왔다.


이전의 미국생활은 학위라는 명백한 목표가 있었다.


호주는 그냥 취직이 되겠지. 비자 문제는 없으니.


이런 대단히 막연하고 위험한 생각으로 저지른 일이였다.


엿튼.


2-3년 먹고 살 자금은 있다. 태어나서 처음 느낀 경제적 여유. 실수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몸도 마음도 영혼도 너무나 지친 때였다. 이 정도라면 정당화가 될까?


그래도 호주에는 와잎 작은 처제 부부가 살고 있고, 내 작은이모랑 사촌들도 각자 정착해서 살고 있었다. 어떻게든 정착할 방법은 찾을 수 있을거다.




12월은 한 여름이다.


시드니는 미국 서법과 홍콩을 섞어놓은듯 하다.


미국은 역 주변이 슬럼가가 많다면, 호주는 한국처럼 역세권이 발달되어 있다.


Pitt street 주변처럼 세계적으로 화려한 동네가 있는가 하면, Campsie처럼 밤에 다니기 무서운 동네도 있다.


대중교통은 서울 같다. 약간 느슨한 정도. Walkable한 상점가가 매력적이다. 미국처럼 광활한 대지에 끝이 안보이는 주차장, 그리고 다 실내에 만들어져있는 창고같은 상점과 다르다.


무엇보다도 도로가 반대로 가는게 너무 긴장된다. 코너 돌때마다 역주행 하는 느낌.


백인들이 촌스럽다.


머리를 안잘라서 어깨 아래 내려오는 남자들이 많다. 그리고 맨발. 정말 많다. 맨발.


백화점에 파는 옷들도 뭔가 촌스러운데, 가격대가 황당할 정도로 비싸다.


미국은 그 당시엔 공산품은 한국보다 쌌다. 호주 달러는 그 당시에 미국달러보다 비쌌다. 지금은 65센트인가 그렇지만.


그래도 미국처럼 고도비만자는 적은듯.


미국 여느 대도시처럼 영어와 영어 아닌 언어가 거의 1:1로 들린다.


그 넓은 땅덩어리에 비해, 도로가 희한할 정도로 좁다.


18 휠러 같은 큰 트럭이 옆 차선에 있으면, 내 차 사이드미러에 닿을 정도로.


미국은 네이버후드들이 다 메이저 도로에서 좀 떨어져 있다. 그래서 도로를 달리다 보면 집들이 잘 안 보인다.


호주는 집과 도로가 딱 붙어있다.


미국은 네이버후드라 불리는 주택 단지들 안이 아니면 밖에 사람들 다니는걸 보기 힘들다. 뉴욬 시티 내부 정도를 제외하면.


호주 시드니는 사람들이 다 발코니에 나와 앉아있다. 길거리에서 어슬렁거리거나. 너무 신기하다.


도착해서 시드니 이너 웨스트에 있는 Ashville이란 동네에 여장을 풀고, 차를 렌트 하고, 아파트를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도로 방향이 반대인 것은 의외로 적응이 빨랐다.


운전자 석에 가까운 쪽이 중앙선이다. 이것만 기억하면 된다.


다만 와이퍼 레버랑 시그널 레버가 반대인것은 거의 호주 떠날때까지 헷갈렸다.


개스페달과 브레이크 페달은 다행히도 순서가 같았다.


그 당시에는 구글맵이 없었어서 근처 쇼핑몰 가서 GPS를 하나 사서 붙여놓았다.


다음날 아침에 나와보니 없어져 있었다.


호텔 직원에게 물어봤다.


CCTV 찾아보겠노라 했다.


며칠 전에 사촌에게 Ashville에 여장 풀었다 했더니 그동네 좀도둑 많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다.


호주 온지 며칠만에 겪은 어이없는 도둑질이였다.


물론 호텔 직원은 CCTV에 아무도 안 찍혔다 했다. 하하.




시드니 아파트를 구하러 다녔다.


와이프는 무조건 시드니 하버 강 건너 북쪽 지역을 살아야 한다고 해서 그쪽을 돌아다녔다.


플로리다에서 살 적에 학교 아파트 한달 렌트가 450불이였다.


시드니 아파트는 일주일에 450불이였다.


겁이 덜컥 나기 시작했다.


말도못하게 작은 아파트들. 화장실 두개는 꿈도 못꾼다. 방 두개 집도 하나는 베드룸으로 쓸 수 없는 사이즈.


뭐 어쨌든, 월 2200불짜리 아파트를 Wollstonecraft 지역에 계약했다. 지금은 훨씬 더 비쌀거다. 호주 달러도 많이 떨어졌고, 인플레이션도 높았고 하니.


개인 차고에 지하에 스토리지도 있었다.


여기서 호주 거미줄의 위력을 처음 알았다.


스토리지가 거의 하얗게 거미줄로 덮혀 있다.


그리고 발코니 바깥에는 큰 야자수 같은 나무가 있는데,


밤만 되면 팔뚝만한 과일박쥐가 거꾸로 매달려 열매를 뜯어먹는다.


그리고 2층까지 올라오는 무슨 나무같이 크고 두꺼운 고사리들.


차도 하나 구입했다. 10살 넘은 혼다 CR-V.


진짜 호주 생활의 시작이다.




기억이 잘 안 나긴 하지만, 한국을 떠나기 전에 몇 호주 회사인지 리크루터인지랑 연락을 취했던것 같다.


도착하고 정착하고 숨 좀 돌리고 나니, 이제 취업을 뛸 차례가 되었다.


이런 저런 잡 사이트를 찾아내고, 어플라이를 하기 시작한다.


혹시나가 역시나인지, 아니면 왠걸인지, 몇달이 지나도록 인터뷰는 커녕 전화, 이멜도 안온다.


불길한 느낌.


박사 졸업후 게인즈빌의 마지막 시간이 떠오른다.


뭐든지 안되던 시간.


하면 안되는데 그것밖에 안보이던 시간.


여기 시드니에서 다시 시작된다.


결정적으로 실수한 것이 있었다.


여기는 퀀트 잡이 없다!


물론 한국에서 미리 호주 잡을 볼 때는 잡이 있긴 했다.


하루종일 그것만 보고 있으니 알았다.


한국처럼 아예 퀀트 직종 자체가 없는건 아니지만,


너무너무 적다. 그것도 은행 몇군데에서만 포지션이 나온다.


미국에서 매일 보던 리쿠르터 포지션들 제외한 임플로이어가 직접 올린 포지션 30-40 군데 정도면,


어디가 나랑 맞고 어디가 나랑 안 맞는지 파악이 가능한데,


여긴 뭐 그런거 없다. 아주 가끔 하나 나오는데 나랑 안맞는 퀀트 포지션이다.


당황의 시작이였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이 참에 호주 대학교 포닥, 즉 Postdoctoral researcher자리라도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멜본에 예전에 몇번 이름은 들어본 교수가 있는걸 알고 이멜을 써봤다.


뭐 안봐도 뻔한 반응.


예전에 게인즈빌 시절 친분이 있었던 데이빗 이라는 아저씨의 말이 생각났다.


CFA 따 보라고.


생각해보니, 내 금융지식은 사실 그닥 내세울게 없었다.


금융지주사에서 배운 몇가지 실무가 다 인데, 회사일이라는게 다 그렇지만, 휘발성이 높다. 특정 분야에서 강하더라도 옆자리만 가면 쓸모가 없다.


박사라는, 그 간에 한 리서치는 너무 무겁고 장황하다.


그래서 CFA 1차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그 참에, Coursera에서 금융, 통계, 경제 수업들을 온라인으로 수강하기 시작했다.


재미있게도, 이 때 배운 금융지식이 박사시절 금융지식보다 더 많다.


그때는 확률 모델에 거의 매몰되다 시피 한 타이밍 인지라.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공부하고 어쩌고 한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나? 잘 모르겠다.


차라리 그 때 취직을 했으면 굳이 필요없는 지식이 대부분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관없다. 시간은 붙잡을 수 없고, 기회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으니.




호주생활은, 그래도 신혼인지라, 취직을 못 한다는 심리적인 타격은 게인즈빌 마지막 시절보다 훨씬 수월했다.


작은 처제네, 사촌네 종종 방문했다. 호주 한국인들의 이민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내 작은이모랑 사촌네는 호주 이민 초창기 세대에 가깝다.


호주가 백호주의를 버리고 이민을 개방한지 얼마 안 되서 온 케이스라,


힘든 점도 많았지만 아무것도 없이 뭔가를 일으킬 기회도 많았다.


호주의 한인 사회는, 지금 생각해도 대단히 의아한 점이 많다.


첫째, 호주 백인들 인더스트리랑 거의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미국처럼 H-1B 비자 같은 전문직 비자가 있는데, 457 비자인가 그렇다. 지금은 없어진 걸로 안다. 호주 회사를 다니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대부분 아시안 마켓, 아시안 음식점, 스시바, 런치바, 빌딩 청소 등, 미국에서 1950년대 전쟁 후 항만 하역, 청과물상, 세탁소, 뷰티 서플라이 이런식으로 미국 산업에 진입했다면, 호주에서는 워킹 홀리데이와 한인 관광객들 대상 비즈니스가 아니면 너무나 열악해 보였다.


둘째,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아 있다. 당장 성당 미사를 가서 성가대 성가를 들어도 뭔가 침울하다. 그 아름다운 경관과 너무 대비되게도. 호주 현지인 미사를 가도 미국 현지인 미사랑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영어쓰는 백인들인데 분위기가 이렇게 다른가? 백인들도 느릿 하고 흐릿 하다.


셋째, 삐끼가 있다! 레스토랑 앞에 삐끼가 있는건 한국 빼고 호주에서 처음 봤다. 상점가에 가면 리쿼 스토어가 정말 많다. 호주인들은 어떤 면에서도 미국인들보다 애주가인듯. 뭔가 한국인들과 비슷한 면이 많다. 소리 고래고래 지르는 백인은 시드니에서 처음 봤다.


넷째,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도 한국인들보다 잘 사는것 처럼 보이지가 않는다. 미국에서 수없이 보았던 잘난 백인들, 세계를 주무르는게 자기들 의무라고 생각하는것처럼 당당한 백인들이 아니다. 물론 부유한 사람들을 보지 않은것은 아니지만, 사는게 다 그냥 그렇다. 미국인들 같은 스케일이 전혀 안 보인다. 시드니에서 태어났으면 거기만 돌고, 멜본에서 태어났으면 거기만 돈다.


다섯째, 외국인들. 이게 제일 의아했던 점이다. 미국에선 히스패닉이던 동양인이던 인도인이던 누구던 미국 경제권에 어떤 방식으로든 편입이 된다. 물론 Ethnic 상점이나 음식점은 많지만, 이게 그 이민자들의 주 생계 수단은 아니다. 그런데 호주의 외국인들은 마치 무주공산에 식민지를 만드는것 처럼 지들끼리 모여서 지들끼리 산다. 분명히 호주의 메인스트림 경제권은 있다. 여기에서 외국인을 보는건 매우 힘들다. 최소한 2세는 되어야 문이라도 두드릴 수 있을까?


여섯째, 사람들이 꿈이 없다. 마치 진공상태에서 사는 느낌이랄까? 나라 전체가 정체성도 없고 방향성도 없는 느낌. 호주는 독립을 쟁취한 국가가 아니다. 그리고 어떠한 국가적 위기를 극복했거나, 못살던 나라가 잘살게 된 그런 케이스도 아니다. 대영제국 무역 네트워크에서 처음부터 부유하게 시작했다. 물론 죄수로 시작한 나라 답게 못사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에게 미국인들처럼 성공 신화를 종교마냥 믿는다던가, 아니면 그냥 고도비만과 마약에 찌들어 사는 극과 극이 아닌, 그냥 다들 밍밍하게 산다. 내 사촌 말로는 호주는 미국 자본이 주인인 광산 금융 대규모 농업 기업을 제외하면 후진국이라고 하던데 사실 맞는 말 같다. 마치 정부와 대자본가들, 이들을 서포트하는 엘리트들이 다 해쳐먹고, 중 저소득층을 복지시스템으로 불만을 잠재우며, 외국인들 들여와서 막일들 처리하는 나라랄까.


일곱째, 첨단 산업이 없다. 그리고 그걸 육성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대학 교육의 질이 그닥 높지 않다. 당장 비슷한 캐나다랑 비교해보더라도 호주랑 캐나다 대학들의 랭킹만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인구에 비해서 월등히 높은 토지의 인구 부양력 덕분에, 굳이 힘들게 뭘 해서 산업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 한국과 정확히 정 반대 포지션이다. 내가 이부분에서 결정적으로 실수를 한 셈이다. 난 남반구의 미국인줄 알았다. 아니였다. 영주권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는데, 진료 의사가 내 간 기증 수술 자국을 어루만지며 놀라워 하던게 기억난다. 이런게 가능한지 하면서.




엿튼, 호주생활 2년차가 가까와 오던 시점이였다.


내려놓을건 내려놓고, CFA 시험도 보고, 수업도 여러개 듣고, 이렇게 살았다.


돈은 계속 깨져갔다.


와잎은 이민법무사 일을 다시 시작했지만, 수임도 없다. 그래서 수입도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그냥 부부가 2년 내내 논 셈이다.


그리고 와이프가 유산을 했다.


우리는 점점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된 건가. 꿈을 깰 때가 된건가.


어떤 패밀리 오피스에서 연락이 왔다. 인턴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그당시 39살이였다. 미국이던 호주던 처음으로 한국 아닌 곳에서 회사라는 데를 가보게 되었다.




패밀리 오피스 란 말하자면 재벌 패밀리의 자산을 관리해주는 회사를 말한다.


앤드류 뭐시기였는데, 호주 내 다섯번째 안에 드는 재력가라 들었다.


한 두어번 봤는데, 작달막하고 조용히 말하는 백인 중년 아저씨.


날 뽑은 매니저는 나보다 훨 어려보이는 홍콩 출신 친구였다.


뭐 mean variance optimization이런 거 몇번 물어보더니 회사 나오라고 한다. 인턴 기간은 4주란다.


사무실은 뭐 대단히 작았다. 그건 신경쓸것 없고. Wynyard라고 시드니 CBD 한가운데 있는 지역에 있었다. 오페라 하우스가 눈에 보일 정도.


양복에 먼지 털어내고, 출근 루트 찾아내고 등등, 분주해졌다.


와이프가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첫 출근날.


버스 정거장 놓칠까봐 무지 긴장했다.


내리자마자 거지 세 명이 얘기하는것을 봤다.


백인들이였는데, 그 중 하나의 거지가 자긴 미국에서 왔다고 했다.


나머지 둘이 무지 황당해 하는 걸 보며 빌딩으로 향했다.




시시했다. 생각보다 더. 이거 할려고 2년을 끌었나.


이런 생각이 돌긴 했어도 기쁘긴 했다.


퀄리피케이션이 문제가 아니라 진입이 문제였으니,


일단 진입하면 문제가 없어 보였다.


호주는 노동법이 워낙 까다로워서 해고가 불가능에 가깝다 한다.


따라서 그만큼 사람을 뽑는데 까다롭게 구는 거다.. 라고 내 사촌이 기뻐하며 얘기해 줬다.


어쨌든, 난 실로 오랜만에 진도를 쭉쭉 뽑았다.


점심 즈음 되면, 다들 사라진다.


난 걸어서 10분 가량 가면 나오는 푸드 코트에서 도시락을 먹고 돌아온다.


그걸 한 3주 하니, 이게 내가 원했던 삶인가.. 라는 생각이 들랑말랑 하지만,


그 2년간 야인생활이 너무나 견디기 힘들어서, 그냥 즐거웠다.


드디어 난 내 바보짓을 극복할 때가 된 거다.


호주에서 퀀트 잡은 보수가 대단히 짜다.


그때 호주달러로 퀀트는 8만불이 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연봉이.


시드니 외곽의 통근 편도 한시간짜리 투베드 아파트도 50만불이 넘었다.


앞으로 어떤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과연 얼마나 삶이 더 개선이 가능할까,


이런 현실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





데이빗 윔벌리라는 사람은 CPA를 하던 사람이다. 내 박사 2년차에 금융공학 석사로 온 사람이다. 탈라하시에 산다.


퀀트가 되고 싶어했던 사람이다. 물론 그런 자질이 있어보이진 않았지만, 2009년 당시에 54세인가 그랬으니 뭐 그게 그닥 중요했나 싶다.


이사람이 CPA, 회계사 사무실을 접고 시작한 개인사업이 있었다. valuation service, 즉 작은 자영업자나 소기업들을 매각하거나 인수하려 할때 기업 가치를 평가하는 일이였다.


CFA 1차 시험에서 잘 나오는 내용이고, 기본적으로 DCF, 즉 현금흐름 디스카운트 하는 거라 수학적으로는 별 문제 없었다.


이걸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연락이 온거다. 일은 많은데 할 사람이 없다고.


언제 왔는지 기억이 잘 안나는데, 아마도 위의 인턴 하기 얼마 전이였던것 같다.


탈라하시 플로리다.


내가 다닌 학교의 라이벌.. 격인 FSU가 있는 동네다.


H-1B 스폰서 해주겠다고 한다.


2년간의 야인생활 끝에 갑자기 기회가 쏟아지는건가.


여기서 대 혼동이 오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 미국에 갈 기회가 생겼다. 호주에서는 2년만에 드디어 세틀이 되기 시작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와이프랑 또 다시 무한 토의에 들어갔다.


물론 난 이미 미국으로 기울고 있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니! 이민병 또 도진다.


와이프는 이렇게 말했던것 같다.


지금 내가 기회를 잘 잡아서 여기서 사는 모습을 생각해보면 그걸 미국에서 기회를 잘 잡아서 사는 모습이 어떻게 다를것 같냐고.


물론 미국이 나았다. 건강보험 서포트 하는 풀타임 잡 만 있으면 미국만한 나라가 없다.


그래도 2년간 버텨서 얻은 이 포지션이 너무 아까웠다.


내 보스는 내가 인턴 후에 풀타임 포지션으로 앉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으로 간다 했다.




물론, H-1B 비자 추첨될 확률은 석사 이상시 60%인가 그랬다.


그리고, 그 이후 심사에서 떨어질 확률도 있었다.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아마 위의 추첨 붙고 나서 회사에 알렸던 것 같다.


이젠 거의 꿈 그 자체였다.


게인즈빌에서 꺾였던 내 길을 복구할 기회가 열린 것이다.


비자는 수월하게 나왔다.


시드니의 미국 영사관에서 비자 인터뷰를 봤다.


이케아에서 산 가구들, 이것 저것 샀던 가전제품들, 전부 다 싸서 컨테이너로 미국으로 보냈다. 하나도 빠짐없이.


차를 팔 때가 됬다.


차를 온라인 Classified 사이트에 올렸다.


호주에 이렇게 치졸한 인물이 많은지 처음 봤다.


내가 올린 금액보다 조금만 싸게 팔란다.


자기 지금 약속장소 30분 남았는데 조금만 더 깎아 달란다.


20분 남았단다. 더 깎아 달라 한다. 난 일단 와서 얘기하자 했다.


10분 남았단다. 자긴 더 깎아야 하겠단다. 난 무시했다.


약속 시간 지났다. 안 나타난다.


이런 일 두어번 겪고 나서, 이 차 샀던 중고차 딜러에게 가서 되팔았다.


사촌들과 작은이모에게 작별인사 하고,


처제네랑 마지막으로 맨리 비치 바에서 맥주한잔 하고,


H-1B 비자 나오고 비행기 예약한 날 날씨는 무지 좋았다.


호주 특유의 피부를 찌르는 햇빛.


처제와 동서는 공항까지 배웅해주었다.


이렇게 호주생활은 끝났다.


첫째 이민병도 끝났다.


작가의 이전글11/20/2025 목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