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9/2025 토요일

3차 시도: 탈라하시. 대반전.

by 윤준희

10월 31일 2014년 할로윈.


탈라하시 공항. 늦은 밤.


플로리다의 10월 치고는 꽤나 쌀쌀하다.


차를 렌트하고, 예약해놓은 호텔로 향한다.


4년만이다. 드디어 돌아왔다. 세번째 정착 시도.


호텔 여기저기에서 핼로윈 파티하는 사람들의 북적거림이 들린다.


감개 무량하다. 이 시간.




호주에서부터 탈라하시 한인 성당 사람들과 인터넷을 통해서 접촉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수월하게 정착은 진행됬다.


탈라하시는 플로리다의 스테이트 캐피탈 이다. 한국말로 주도 라고 한다.


게인즈빌이랑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


도시 구조, 미국인들 분위기, 뭐 다 다르다.


흑인이 일단 월등하게 많다. 그리고 게인즈빌보다 작다. 뭐든지.


다만 주 정부 청사와 오피스가 많은 정도가 다르다.


재미있는건 토질도 다르다. 플로리다 팬핸들 지역이라 그런가. 플로리다 특유의 석회질 가득한 수돗물이 아니다. 땅도 희멀건게 아니라 붉은 색 흙이다.


전반적으로 좀 더 가난해 보이는 느낌.


그 동네에서 가장 중심에 있다는 쇼핑몰에 갔다.


흑인이 80% 최소한 되어 보였다.


와이프가 왜 이런데 살러 왔냐고 화를 낸다.


나는 흑인들 많다고 싫다면 인종차별이라 했다.


대판 싸웠다.


와이프는 지금도 그렇지만, 흑인들을 만나본적이 없다.


지금도 그 얘기 나오면 싸운다. 합의가 안되는 부분.




호텔에서 이틀 정도 지내고, 데이빗이 몬티첼로에 있는 자기 오피스에서 아파트 잡을 때 까지 지내라고 한다.


오피스라기 보다는 데이빗 부모님 집인데, 유산으로 받았다. 비워져 있어서, 오피스로 쓰기도 한다.


몬티첼로는 탈라하시에서 북동쪽으로 40마일 정도 가면 나오는데, 조지아랑 매우 가깝다.


무너져 가는 동네는 아니지만, 깡촌이라 불릴 만한 사이즈다.


컬리지 스테이션 텍사스에 견줄만하다. 아니 학교 뺀 컬리지 스테이션보다 더 작다.


데이빗은 선의겠지만, 우리는 적쟎이 당황했다.


3일 정도 있으면서 아파트 계약하고 나왔다.




탈라하시 한인성당 분들을 만났다.


미국의 여느 한인 성당처럼, 미국 성당에 한인 커뮤니티로서 세들어 있다.


일요일에 그 성당에 가서 미사 하고 인사 했던것 같다.


게인즈빌 신자의 1/3 정도 된다. 많이 오는날 스무명 정도?


학생 조금, 교수 조금, 플로리다 주정부 공무원 조금.


많은 정보를 듣고, 아파트를 찾아 계약했다.


이 성당 커뮤니티가 지속 가능성이 있을지 상당의 의문이 들 정도로 인원이 적다.




데이빗을 만났다.


데이빗은 지역 라이온스 클럽 집회에 날 데리고 갔다.


한국에선 대략 80년대 까지 얼주 본적이 있었던것 같은데, 신선하다 해야할지 왜 여기 왔는지 매우 의아하다.


기본적으로 데이빗의 비즈니스 모델은, "you eat what you kill"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곳에 간 이유는 나보고 알아서 고객을 만들어봐라 라는 의미였다.


2014년 6월인가에 데이빗이랑 작은 프로젝트를 하나 진행한 적이 있다.


간단한 discounted cash flow로 밸류에이션 하기.


대금을 지금 줄까 나중에 줄까 하길래 미국에 가서 받겠다 했다.


3천불 정도 프로젝트였던것 같다. 영원히 못 받았다.


그리고 H-1B 비자를 신청할때 expedite로 신청했다. 1500불인가 더 주고.


나중에 변호사를 통해서 알았는데, 데이빗이 일반으로 신청했다.


1500불은 데이빗이 가져갔다.




처음 정착하고, 4개월 가량인가, 데이빗이랑 연락한게 서너번, 만난건 두어번 밖에 안된다.


정착 시간을 주는거라고 생각해도, 뭔가 꺼림직 하다.


위의 돈 문제들은 그냥 데이빗이 좀 나중에 주려니 했다.


데이빗은 기업주도, 기업의 팀장도 아니다, LLC 하나 만들고 비즈니스를 하는 자영업자에 가깝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초조함이 늘어갔다.


호주에 있을때는 일이 충분히 있다고 한것 같은데, 일이 어딜 봐도 보이질 않았다.


어느날인가, 난데없이 박사학위를 준다고 한다. 이미 있는데.


Fordham university인가, 못들어본 곳인데 졸업장 두장을 오피스 데스크 위에 올려놨다.


하나는 내거, 하나는 데이빗 거.


그 즈음에 링크드인에 데이빗 이름 앞에 Dr.가 붙어있는걸 봤다.


의심이 증폭됬다.




대략 탈라하시 온 지 6개월 정도 후였던 것 같다.


이건 뭔가 잘못됬다고 판단했다. 6개월 내내 급여는 커녕 일도 없다.


호주 시절에 한 프로젝트, H-1B 급행 비용 다 못 받았다.


가끔 만나는 곳이 데이빗 아들 - 나보다 두 살 어린듯 하다 - 의 SunTrust 은행 지점에서 만났다.


이런 저런 프로젝트 이야기를 하는데, 구체적으로 돈이 될만한 내용이 없다.


그 때부터 다시 구직을 시작했다.


호주에서 근 2년동안 야인생활을 했는데, 또 야인생활의 시작이였다.


그 때는 영주비자 - 와이프가 시민권자라 - 라 체류 신분에 문제는 없었는데, H-1B비자는 급여를 못 받으면 바로 Out of status다.


아마도 이 때가 내 인생의 가장 로우 포인트였던 것 같다.


돌고 또 돌아 야인생활이라니.


호주에서 살던 삶이 다시 시작됬다.


CFA 2차 시험을 준비하고 봤다. 잭슨빌에서.


Coursera 수업도 다시 듣기 시작했다.


똑같이 링크드인에서 지원을 시작했다.


돈은 계속 깨져간다.


기도는 계속 깊어간다.




성당 미사 기타 반주, 성가대 연습, 이런저런 성당 일들.


심리적으로 갈피를 못 잡을때 너무나 많은 도움이 됬다.


탈라하시 한인 공동체는 지금도 그렇지만 너무나 열악하다.


한국 신부님을 모시는 일이 재정적으로 불가능한데, 그걸 무리해서 진행했다 보니, 재정 부담이 너무 심했다.


그리고 신자들간 불협화음이 너무 심했다.


흔히 봐 오던 일이라 처음에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실 대수롭지 않을 수 있는데, 재정적으로 열악하다 보니 사소한 갈등이 증폭이 된다.


그리고 FSU는 공대 이외의 학과에서 온 유학생들이 많은데,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전공으로 유학온 친구들의 학과 재정 보조 또한 너무 열악했다.


그러니 공동체 전체가 재정적으로 열악할 수 밖에 없다. 공무원들은 쥐꼬리 월급인건 어딜가나 마찬가지고.


그러니 남은 신자들의 유대감은 역설적이게도 매우 강했다. 서로 어쨌든 의지해야 했으니.




와잎이 임신했다.


2015년 초 였다.


나중에 다른 글로 쓰겠지만, 산부인과 잡는것이 미국에서 했던 일 중에 가장 어려운 일 탑 5 안에 들어간다.


미국 의료시스템의 악명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충격 그 자체였다.


보험도 있는데, 탈라하시에 하나 있는 종합병원에서 Obgyn을 찾으니 바로 환자 안 받는다고 전화 끊는다.


나중에 여러번 겪었다. 이 때 배운 덕분에, 이후엔 충격은 덜했다. 다만 처음 병원에 전화할때마다 싸움모드다. 이상한 소리 하면 무조건 소리지르고 싸운다. 그래야 됬다. 불행히도.


엿튼 어떻게 어떻게 산부인과를 잡았다.


호주에서 유산의 경험 때문에 와잎은 패닉 모드 그 자체였다.


난 나대로 예산 확보하는게 문제였다.




딸내미가 태어났다.


예정일보다 15일 일찍 태어났다.


예정일에서 7일 전에 장인장모님이 오시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보다 먼저 태어났다.


산통이 심해져도 일단 예정일보다 많이 이르니 지켜보자 했다.


일요일이였는데, 성당 가서 반주를 했다. 미사 끝나자마자 와이프가 병원 가야한다고 한다.


차에 기타랑 앰프 다 실은 상태에서 와잎 픽업해서 바로 병원으로 갔다.


이 때 성당 분들의 정말 많은 도움이 있었다.


미국 산부인과는 분만실이 따로 있지 않고, 1인 입원실에서 분만을 한다.


에피드랄 맞고 산통이 좀 가시면,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다.


이 때 성당 분들이 찾아와서 저녁도 주시고, 집에 음식도 만들어 아이스박스에 넣어서 놓아주신다.


분만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애아빠가 됬다. 덥고 눅눅한 탈라하시의 늦여름. 2015년 10월.


형하고 똑같은 갓난아이가 나왔다.


부모님 돌아가시는 것 이상으로 내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다.


애 초유 먹이기, 기저귀 갈기, 목욕 시키기, 배냇옷 입히기, 등등. 간호사들이 와서 한 두번 스윽 보여주고 간다.


장인 장모님은 7일 후에 오신다.


와이프는 에피드랄 기운이 남아서 몽롱해 있다.


모든게 내 몫이다.


태지가 잔뜩 붙은 갓난쟁이. 조금이라도 배고프면 그 조그만 몸집에 세상이 떠나가라 처절하게 운다.


뭐라도 해야 한다.




애아빠 되는법 빡세게 배웠다.


새벽에 포뮬러 먹이기. 트림 시키기, 목욕시키기, 재우기, 기저귀 갈기, 끝이 없다.


장인 장모님 오시고 좀 나아지긴 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필라델피아 외곽에 있는 보험사 에셋 매니지먼트에서 연락이 왔다.


이 쯤 되면 거의 반사적으로 내가 할만한 포지션이 나오면 어플라이를 하기 때문에, 지원한 회사에서 연락이 와도 어딘지 기억을 못 한다.


여느때처럼 진행을 했다.


오랜다. 필라델피아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가 11월이였을거다.


태어난지 한달 남짓된 딸내미랑 와잎, 장인장모님을 두고 필라델피아 행 비행기를 탔다.



리무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리둥절 했다.


낙엽이 휘날리는 필라델피아 외곽도로를 지나, 회사가 있는 곳 근처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 날 아침.


역시 회사가 잡아주는 호텔은 각이 잡혀있다.


뭔가 격식이 있어보이는 아침식사를 하고, 체크아웃을 하고, 여행가방을 질질 끌고 행길을 가로질러 회사로 들어간다.


사람들이 날 반긴다. 너무나 어리둥절 하다.


다들 우리 팀이 얼마나 일하기 좋은지, 회사가 좋은 회사인지 광고를 한다.


미국에서 8년가량 살면서 단 한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환대.


언제나 불청객 대접, 고생이란 고생 다해서 연구하고 고생하면 무시당하는게 당연했던 석-박사 과정.


2년동안 구직하고 기껏 인턴자리 얻었던 호주.


사기 비슷한것 당한거라고 밖에 볼 수 없는 데이빗.


마치 아이가 태어남으로서 모든게 바뀌어버리는 순간 같았다.


그리고 오퍼를 받았다.




마지막 남은 장애물은 H-1B 갱신이였다.


내 상황이 out of status였기 때문에, 비자 갱신이 되는지도 불분명했다.


그 회사의 이민 변호사는 내 케이스가 messy하지만, 될 거라고 한다.


마치 병특 시절 티오 옮기는것과 거의 같은 상황이였다.


H-1B는 갱신이 된다고 했다.


문제는 있었다.


내가 한국에 가서 H-1B를 다시 받아 와야 하는것 이였다.


와이프는 H-4비자로 있었는데, 한국에 가면 비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미국에 있는게 좋다고 변호사는 말한다.


갓난쟁이 두고 와이프 혼자 비자 갱신될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기간은 2 주 걸린다 했다.


방법이 없었다. 가야지.


또 이 때 형이 결혼을 한다. 희한한 타이밍 매치였다.


그래서 나만 부랴부랴 한국으로 갔다.




형의 처가 입장에서는 내가 유일한 직계 사돈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형수님 처가 만나고, 내 외가 쪽 친지 만나고, 등등 부랴부랴 시간을 맞춰나갔다.


물론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는 비자였다. 그리고 두고온 딸내미.


장인 장모님은 나 한국 가고 2주 후인가 뉴질랜드로 가셔야 했다.


한국에서 인터뷰 잡고, 형 결혼식 가고, 한겨울에 핀란드로 신혼여행을 가는 형 부부를 배웅하고,


혼자서 졸지에 엄마랑 형이랑 내가 살던 부천 아파트에 덩그러니 남았다.


비자 인터뷰는 순조로왔다. 다만, 영사가 검사할 항목이 하나 더 있다고 시간이 좀 더 걸릴거라고 한다.


이게 1주가 넘게 걸렸다.


와이프는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형은 핀란드에서 스노우모빌 타다가 뒷 모빌이 들이받아서 빗장뼈가 부러져서 일정 취소하고 돌아왔다.


이 말도못하게 초조한 시간.


드디어 비자가 나왔다는 소식을 받았다.


비자 스티커가 붙은 여권이 택배사 부천 집중국에서 픽업하기로 하고 가방을 쌌다.


도착했다는 시간을 기다려 그 곳에서 여권을 픽업하고 바로 그 시간에 공항으로 갔다.


딸내미랑 와이프가 기다린다.


그렇게 미국으로 돌아왔다.


2016년 1월 23일.


드디어 이민병이 끝났다. 영원히.


야인 생활의 청산이였다.


장밋빛 미래가 펼쳐진다. 너무나 늦었지만, 더 이상 나빠질 수 가 없기 때문에, 지금보다는 장밋빛이다.


기적이라면 기적이다.


였튼 난 미국에 일을 하고 급여를 받으며 정착할 기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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