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필요할까?
서문
현재 한국 청년층의 종교인 비율이 총합 20% 언저리에 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종교단체가 가장 신도가 많냐 아니냐는 의미없는 경쟁이 되었다. 대부분이 무종교인이니. 이는 미국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필자가 즐겨 찾는 부동산 웹사이트에서는 교회 건물이 심심치 않게 매물로 나온다. 운전하다 보면 비어있는 교회 건물을 지나치는건 흔히 있는 일이다. 유튜브에서 보면 신도 감소 문제는 한국 미국을 가리지 않는다. 많은 중소규모 교회 미국 목회자들은 투 잡을 뛴다. 많은 교회들은 노인들에 의해 운영된다. 그 분들 한분씩 돌아가시고 더 이상 운영이 불가능해지면 문 닫는 것이다.
전근대 시절의 종교, 신앙, 영성 등의 개념은 압제를 정당화 하기 위한 국가 레벨 개스라이팅으로 폄하되었다. 현대엔 종교는 다음과 같이 인식되는 것 같다. 1) 브랜딩, 즉 나의 사적인 영역에 대한 일종의 브랜드 확보, 2) 제례, 즉 특정 의식을 행하거나 기도함으로서 자신의 의무 혹은 종교적 세계관에서 자신의 위치 확인 3) 기복, 자신의 기도가 절대적 존재에게 전달되어 초자연적인 해결책이 나오길 바람, 4) 소셜, 젊었을때는 교회오빠나 성당누나 찾기, 중년 이후엔 비즈니스 관계, 가족 친지 관계 이외의 신앙을 매개로 한 동호회 가입, 5) 선행, 물질적 혹은 재능 기부를 통한 보람 찾기 정도로 정리될 수 있겠다. 다만, 이들은 대체재가 많다. 종교 단체 아니고도 멤버십 사교 클럽은 많으며, 선행은 자선단체에 기부하면 된다. 기복 및 제례? 로또 사볼까?
그렇다면 신앙과 영성은 현대 사회에서 화석화된, 퇴화되어 가는 개념일까? 그렇다면, 간단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해보자. 우린 왜 사나? 태어나자마자 죽어간다. 한시간 즐겁기 위하여 세시간 고되게 일해야 한다. 무엇이 옳던 옳지 않던 이 사회에서 살아 남으려면 수 많은 규범과 제도를 익히고 닥쳐오는 도전을 이겨내고 성과를 만들어야 하루하루 살 수 있다. 이런 현실을 피할 수록 더 많은 괴로움이 다가오거나, 타인에게 그 괴로움을 전가해야 한다. 당장 하루하루 먹는데에만 수 많은 생명이 희생된다. 당장 대형 병원에 가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라. 어떠한 삶을 살다 왔는지는 모르지만 죽음의 과정은 극히 예외를 제한다면 그닥 아름답지 않다. 그러면서 굳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뭔가? 그리고 우리는 아이를 낳아 기름으로서 이러한 괴로움을 연장시킨다. 깔끔하게 모든 핵무기를 터뜨리는것은 어떨까? 우리 모두 지구상에서 증발되면 이 모든 고통도 영원히 사라지는것 아닐까? 그러나, 종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르는, 그리고 알기가 불가능한 모든 삶의 여정과 고난에 대한 궁극적인 의미와 방향성을 제시한다. 이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대체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종교엔 각각 진입장벽이 있다. 롤플레잉 게임의 세계관처럼, 대략 2000-3000년 전에 만들어진 세계관과 말씀을 지금 이 시점에 적용해야 한다. 여기서 종교 단체라는 벽을 넘어서 그 안의 온전한 신앙과 영성을 종교의 틀을 배제하고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비 종교인, 종교 중립적, 혹은 비 신학적인 위치에서 신앙과 영성의 필요 여부를 다루는 글은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과연 신앙과 영성은 우리의 삶에 굳이 필요없는것일까? 아니면 있어야 하는데 현실에 의해 뒤틀려있거나 퇴락한 경전에 의해 가려져 있는것일까? 본 문서는 이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책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종교가 완전히 배제된 삶에서 긍정성을 찾아보고, 영성을 추구하는 삶 또한 찾아본 후 그 두 모델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신앙과 영성은 우리에게 필요한가?
누군가가 종교인이 되었을때 무엇을 원하고 어떠한 길을 걷으려 하는 것일까? 신앙과 그 결실, 즉 영성 (혹은 성화) 일 것이다. 영성이란, 초월적인 근원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고 그를 삶에 적용하는 척도라고 정의하자. 모든 고등 종교는 초월적인 존재를 숭앙하거나 초월성을 내재화 하는데 중점을 둔다. 초월자는 이 세상 어딘가 언젠가에 한정된 존재가 아닌 이 시공간 밖에 있는 존재의 근원이며, 이 모든 인과관계의 시작점이고 종착점이며, 그리고 모든 움직이는 주체-우리 모두를 포함하여-의 모상이라고 정의 해보자. 그렇다면 그 초월자와 우리와는 무슨 관계인가? 초월자가 우리를 진흙으로 만들고 숨을 불어넣었더니 흙이 사람이 되었다? 그런것 보다 초월자와 우리는 부모자식 관계라고 보는게 가장 타당하다. 왜냐면 사랑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빅뱅 이후 지금까지 모든 시공간 연속체에서, 모든 인과관계와 생명의 탄생과 진화 그 모든 단계를 거쳐, 지금 우리까지 우리는 사랑의 결과물이다. 당장 아이들을 보라. 부모와 사회의 사랑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모두 아이들이였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 자녀들에게 그 사랑을 전달한다. 그 사랑이 가족, 이웃, 사회, 나라, 인류, 다른 생명체, 자연 환경으로 확대되어가며 우리 세상이 행복하고 살만한 곳이 된다. 따라서, 모든 고등 종교의 근원적 원리에는 보편적 사랑이 꼭 들어있다. 그리고 보편적이란 의미는 조건 혹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절대적인 사랑, 그리고 사랑은 나 이외의 존재가 잘 되길 바라고 행동하는 일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초월자는 우리에게 무엇인가가 필요해서 우리를 낳은게 아닌것처럼. 우리가 애들 낳아서 이득을 얻으려고 낳은게 아닌것처럼. 그럼 잘 되는것, 좋은 것, 선한 것, 등 도덕 혹은 미덕을 어떻게 정의할까? 간단하게 시작하자면 상호간의 생명 보호, 인권 존중, 생명 존중, 환경 보호 등 우리 모두의 삶,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를 가능한 한 최대한 건강하게 유지하여 이후 세대에게 물려주는 길이 아닐까 싶다. 이에 따라오는 삶과 종교의 문제에 대해서는 뒤의 질문들에서 다룬다.
초월자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 모양인가?
우리는 모두 생명이라는 존재에 묶여 있다. 생명이 없으면 우리도 없다. 생명은 탄생이 있고 죽음이 있는 유한한 존재이다. 그리고 이 생명이란 것은 스스로를 최대한 건강히 오래 유지해야 하는 조건에 묶여 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다른 생명을 죽여 섭취하거나, 같은 종류의 생명과 경쟁하여 살아남거나, 심지어는 같은 종류의 생명을 죽여서라도 나의 생명을 유지해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내 생명을 부모에게서 이어받고 자녀를 통해서 내 생명을 전달한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의 본성, 시작, 그리고 성장이 초월자의 사랑에서 나왔으나, 초월자가 만들어놓은 세상은 사랑만으로 생존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이 다른 생명들에 비해 지혜와 지식의 개발과 전수라는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최대한 사랑만으로도 생존할 수 있게 만든 것이 바로 문명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 경제 정치 문화 과학 모든 역사시대 이래 모든 인간의 성과물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좋다. 문제는 그게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각 인간의 능력 차이도 있지만, 문명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바로 희생이기 때문이다. 인간 개인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희생해서라도, 굳이 생명까지 가지 않더라도 개인의 시간과 노력을 희생해서라도 서로의 생명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 모두의 삶을 유지 할 수가 없다. 생명의 본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를 어느 순간엔 하여야 한다. 여기서 초월성이 필요한 것이다. 생명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 힘, 그리고 의지. 그런데 또 문제가 생긴다. 우리는 생명 바깥에 존재 할 수가 없다. 귀신 유령 뭐 이런건 무시한다. 저 몇천 광년 멀리 어딘가에 저승이 있다거나, 몇억년 후에 다시 뿅 하고 나타난다거나 이런 일은 없다. 결국 우리는 생명에 묶여 있으나 이 세상에서 생명을 뛰어 넘어야 한다. 그 초월성은 전술했다시피 사랑이라는 한 마디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초월성, 즉 사랑이 생명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우리는 생명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마치 가필드 만화의 한 에피소드에 가필드가 자기 꼬리를 들어올리면 공중에 뜨는것 마냥 논센스로 보인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초월성 없이 인류의 삶은 유지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기서 종교가 탄생한다.
그럼 초월자는 왜 우리를 이러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 놨는가?
모른다. 그래서 종교는 신앙을 강조한다. 우리의 문명이 어떠한 방식으로 발전하더라도 우리는 빅뱅 이후 지금까지 모든 생명의 역사와 미래의 모든 가능성에 대한 파악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생명에 내재된 초월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자 그럼 이를 어떻게 일깨우고, 사랑에 어떻게 자발적인 힘과 권위를 부여하며 그 시작과 결과가 어떤지를 생명의 틀내에서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완전한 지식과 시공간적 한계에서 절대성과 무한성에, 한마디로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초월자를, 혹은 초월성에 대한 귀의를 이끌어 낸단 말인가? 그게 신앙이다. 보이지 않아도 믿는자는 행복하다는 뜻은 모르는 뭔가를 무턱대고 믿으라는게 아닐 것이다.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지만 3분 내에 잊어도 무방한, 모르고 살아도 별것 아닌 그런 개념이 아니고, 온 힘을 다 하여 내 마음의 중심으로 자리잡으라는 것이다. 자 그럼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그러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다는 말인가?
영성이란 무엇인가?
여기서부터 현실에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가 보통의 능력으로도 종교적 수준의 성찰과 가르침을 끌어내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철학자, 예언자, 깨달은 자, 그리고 신이자 인간인 자까지, 인류 역사에서 몇 안되는 사람들만이 초월자와 현실을 이어주었다. 인간에게 지극히 어렴풋하게, 본능적으로, 마지못해서, 왠지도 모른체 태어나고 죽어가던 사람들에게 길을 알려주었다. 그 길은, 이 세상에서 생존 본능에 따라 살때 그 본능에서 파생된 사랑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부작용들 - 폭력, 압제, 사치, 교만, 나태, 등등을 멀리하며, 보편적인 사랑을 향한 궁극적인 도덕성을 토대로 인류를 생명 그 이상의 초월성으로 인도한다. 이는 단순한 도덕 교과서와 일주일 두시간짜리 수업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길러지고 배우고 행동하는 그 모든 생존 방식을 뒤집는 것이다. 이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가 잘 아는 대부분의 종교 창시자는 기존 방식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새로운 삶을 본인들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 종교에 귀의한 사람들은 그 새로운 삶을 배우고 살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그 새로운 삶에 더 온전하게 나아간 사람을 일컬어 영성이 깊다고 말한다.
왜 영성이 중요한가?
문제는, 종교 단체 내에서도 영성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것 같다. 비 종교인들은 신앙과 영성을 마치 광신도들이 현실 도피용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라거나, 우리 종교단체에 들오면 자동으로 주어지는 천국으로 가는 티켓이라거나, 뭔지 모르겠는데 일단 찬양하면 뭔가 된다는 억지 라던가, 등등의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필자도 한때 그랬다. 반면, 종단 내에서는 화석화된, 현실과 괴리된 교리의 반복 주입, 그리고 신앙과 별 상관없는 심리 테라피 같은 주제들, 엔터테이닝으로 도배를 해놓은 워쉽테인먼트 예배들, 그리고 최악으로는 아이덴티티 폴리틱스에 빠지는것을 들 수 있을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으므로 좌파가 될 수 없다 라던가. 미국 민주당 지지자들은 전부 Woke라던가 (난 사실 Woke 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어떤 사례도 본 적이 없다.) 등등. 자신과 의견이 다른사람을 부정하거나 비난한다고 자신의 의견은 정당화 되지 않는다. 반면에 영성을 지나치게 규칙화 하려는 시도도 있다. 유명한 바리사이파 혹은 이슬람 근본주의가 그 좋은 사례가 아닐까 한다. 그게 불가능한 이유는 비교적 간단하다. 우리는 모든 가능성과 그 근원의 초월성을 완전히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한 모든것들은 변한다. 사람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자유로움을 원하며,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도 속박되는것보다 위험을 택하는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규칙은 명백히 잘못된 길을 예방하는것이지 무한한 가능성의 미래를 강제할 수 없다.
영성이 깊은 사람은 누구인가?
놀라운 점은, 외려 지극히 평범하거나 정규 신학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종교활동에 열성적이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영성이 깊은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유명 사찰 앞 기념품 가게나 음식점에서 일하는 할머니가 경전에 대해 깊은 이해와 성품을 보여준다던가, 호텔 청소하는 흑인 아줌마가 부르는 노래에 영성이 흘러 넘친다던지, 너무나 착하디 착한 기도를 흥얼거리는 병원 간병인이라던지, 어려운 사람들에게 무심코 선행을 베풀고 사라지는 사람들. 아마 독자도 이런 사람들을 무심히 몇번 지나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숨은 착한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들, 신앙과 영성이 삶에 녹아든 사람들, 본인 힘껏 종교의 본질적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 명성, 경제력, 지위와는 상관없이 깨달은 사람들, 구원받은 사람들, 거듭난 사람들 이 모두는 이 자본주의, 소비 지상주의, 외모 지상주의, 경쟁 지상주의 등 이런저런 주의 들에 의해 본인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떠밀려 다니는 사람들에 비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이러한 사람들이 이 세상을 그나마 살 만하게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힘 아닐까? 또한, 각종 주의 들의 끝은 보통 좋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와 사랑을 어떤 식으로든 제한을 가하여 특정 목적을 성취하도록 설계되어있기 때문이고, 인간 본성의 희생은 무한정 요구할 수 없으며, 그럴 수록 인간은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신앙과 영성이 없는 삶은 어떤가?
완전히 신앙과 영성이 없는 삶은 지속가능성이 없다. 방향성 없는 인생은 인간이라면 견디기 어렵다. 다시 말하지만 출산과 육아도 엄청난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며, 우리 모두 그 과정을 거쳐 여기에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을 출산부터 사망까지 트루먼 쇼 처럼 닫힌 장소에 가둬놓고 모든것을 풍족하게 제공한다고 해보자. 그럼 그 사람이 성장하면서 그 장소를 평생 견뎌낼 수 있을까? 다만, 신앙과 그에 따르는 영성이 특정 종교의 틀을 띄지 않을 수는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문명 중에 실제로 초월자에 대한 신앙 혹은 초월성에 귀의를 하지 않는 문명도 꽤 있다. 당장 동아시아의 전통 종교를 보아도 불교를 제외하면 초월자 혹은 초월성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아 보인다. 당장 옥황상제가 초월자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염라대왕이? 대표적인 경우가 일본의 신토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해서 동아시아의 문명이 미개한 수준이였다고는 누구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 유명한 니체도 힘에 대한 의지를 설파하며 초월성을 닫힌 결말이 아닌 열린 결말로 만들었다. 우버멘쉬가 되어서 말이다. 그것이 무신론이냐 유신론이냐가 아니다. 니체를 위시한 많은 무신론자들도 초월성에 대한 방향성, 궁극적인 도덕성을 많은 경우 긍정한다. 아마도 현대 사회의 진짜 문제는, 신앙과 영성이 급속도로 퇴락하는 이유는, 초월성을 자본주의 식 성과-보상 시스템으로 치환시키려는 트렌드가 아닐까 한다.
초월성은 성과-보상 시스템으로 치환이 가능한가?
모든 성직자는 그냥 직업인으로 간주한다. 모든 선행, 희생, 헌신, 사랑 등 모든 미덕은 그에 따른 보상으로 대체된다. 모든 종교의 교리는 개스라이팅이나 멤버쉽 선언 정도로 묻혀버리며, 구시대의 유물로서 곧 퇴화될 예정이다. 악행은 나에게 피해를 주므로 사법 시스템으로 방지하거나 처벌한다. 내 경제적 활동은 내 생존을 담보한다.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직업과 성과는 더 높은 급여로 보상한다. 사회 구성원은 서로 필요한 물건 및 서비스를 생산하거나 제공하며 경제 시스템을 구성하며, 태어나고 자라면서 이러한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배운다.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수록 자유경쟁 시장시스템의 상층부에 올라가게 되며, 이는 더 높은 보수, 투자, 소비를 제공받게 된다. 이것이 즉 성공이며, 이것이 선행이다. 이것의 삶의 목표가 된다. 우리는 선행 희생 헌신 사랑 뭐 다 좋은 얘기들이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그닥 신경쓸 필요 없는 개념들이다. 타인에게 싫은 소리 안하고 타인도 나에게 그렇게 한다. 상대방이 나에게 아무 관심 없는것 알지만 나도 그러니 상관없다. 서로 할일 하면서 시너지를 내고 가치 창출, 즉 밥값을 하고 퇴근하면 그만이다. 우리 아이들은 이 자유경쟁 시장시스템에서 최소한 중상층을 차지해야 하며, 우리는 아이들을 조금 더 애쓰라고 알게 모르게 강요한다. 곧 인공지능이 인류를 노동에서 해방시킬 것이며, 기술의 발전이 전 인류를 모든 끔찍한 질병과 사회 문제에서 해방시킬 것이다. 인류는 심지어 생명이라는 한계를 부술 수도 있다. 인간의 의식을 그대로 가상세계로 옮길 수도, 휴머노이드 로봇에 이식 시킬 수도 있다. 자원은 태양이 초신성이 될때까지 무한히 에너지를 공급할 것이므로 문제 없다. 지구가 인간이 살기 적합한 환경이 되지 않아진다면? 문제없다. 테라포밍으로 다시 살기 좋게 만들면 된다. 모든 음식은 더 이상 타 생명의 희생이 필요없다. 대기중 이산화탄소만으로도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모두 다 합성 가능하다. 가장 인간에게 이상적인 음식을 공기 만으로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기술 혁명에 동참해서 경제 시스템의 구조조정에 이바지 하고, 그에 따른 새로운 포지션에 취업하여 일을 하고 보상을 받는다.
과연 행복할까?
위의 모든 일들이 현실화 되었을때 우리는 행복할까? 물론, 우리 삶의 한계를 넓힐 수록 우리는 행복하다. 마치 로블락스에서 시크릿 미션을 발견했을때 좋아하는 아이들처럼. 문제는 그 이후이다. 위의 이 복잡다단한 현대 자유시장 경제 시스템과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사람들을 오히려 질식시키는것 아닐까? 예를 들어, 사람의 가치 판단을 물질적, 서비스적 생산력 및 소비에 국한시킨다고 하자. 잘자고 잘먹은 다음엔 그게 그다지 중요해질까? 결국 가치는 희소성에서 나오며, 희소성이 해소되는순간 가치도 같이 없어진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그래서 사람들의 생산성과 소비성향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 컨슈머리즘을 고안해냈다. 출생부터 사망까지 인간의 전 과정을 상품화하고 탐욕을 희소성으로 조작한다. 물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소비하며, 더 높은 부가가치의 것들을 생산 소비할수록 더 높은 계층으로 올려놓고 질투를 유발시킨다. 코롤라를 몰다가 메르세데스를 몬다면 처음 3달은 기쁘다. 메르세데스를 몰다가 벤틀리를 10대 갖고 있으면 별로 기쁘지 않다.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다. 도파민 중독은 끝이 좋지 않다. 결국 자본주의 시장경제도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려면 도덕성과 어느 정도의 초월성을 권장하여야 한다. 대충 남들에게 싫어보이지 않는 정도. 내가 스스로가 초라해보이지 않는 정도. 결국 컨슈머리즘에 함몰된 사회와 그 구성원은 끊임없이 갈증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조작된 욕구는 영속성이 없다. 마치 유튜브 숏의 컨텐츠를 흘려보듯이 인생을 산다. 갈증의 원인도 모른채 이것 저것 흥미로운것들을 찾아다니며. 시간이 갈수록 불만이 쌓인다. 세상이 다 거짓으로 보인다. 세상이 다 광고로 보이기 때문이다. 광고는 내가 갈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나에게서 어떻게든 뜯어내려고 하지.
모든 속박을 거부한다.
이러한 질식할 것 같은 사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난 어떤 종교의 교리도, 사회가 강요하는 어떤 종류의 진로도 거부한다. 난 생명 본연의 한계와 그 슬픔을 온 몸으로 받아낼 것이다. 내 손으로 일하고 가능하다면 배우자랑 같이 우리 아이와 함께 우리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안다. 이미 세상은 잘못된 것들이 너무 많아, 그것만 피해가도 충분히 의미있게 살 수 있다. 결국 다 비우고 다시 시작한다.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다 부수고, 좋은것들만 다시 만들어 나간다. 이미 이 세상은 구제 불능이다. 우리의 끝은 열려 있다. 가라앉는 배에 타 있던, 췌장암 말기 이던 나는 자유롭다. 내가 죽으면 내가 없는데 왜 죽는걸 걱정하나.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유를 원한다. 경제적 여유는 머리 위 지붕과 삼시세끼 먹을 거리만 있으면 충분하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반복된다고? 반복하면 된다. 결국 우리가 만들어놓은 이 문명이라는것은 진정한 삶을 가짜로 만들어 놓았다. 당장 낭떠러지에 떨어지더라도 하루라도 진정한, 내 발이 흙에 닿는, 내 손으로 내 양식을 수확하는 삶을 살 것이다. 물론, 문명을 거부하지 않고도 충분히 자유롭게 힘차게 얽매이지 않고 살 수 있다. 수억년 동안 생명체의 진화 끝에 지금 내가 있다. 내 본성은 내가 잘 안다. 어떤 종교던 철학이던 인생에 궁극적인 의미가 있던 없던 난 하루를 살고 하루하루 죽어간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미 태어난 것은 물릴 수 없다. 삶을 뒤돌아 보면 긍정할 수 있는게 없는건 아니다. 왜 긍정이 되는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파고 들어봐야 어려워지기만 한다. 이 생명 다하여 쓰러질때 까지 난 내 삶을 충만하게 할 것이다. 왜냐고? 그게 그냥 좋으니까. 나는 선함을 무시하지 않는다. 타인을 존중한다. 그게 종교가 필요한 일인가? 나와 내 가족의 생명을 지킨다. 다만, 부담스러운 그 위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의미없는 구호들을 무시하는것 뿐이다.
결론
종교를 접근하고 이해하고 소화하는 방법은 결국 개인의 경험에서 맞닥뜨린 초월성에 대한 이끌림이 그 시작점일 것이고, 신앙이 싹튼 이후에 그 영성을 개발하고 가꾸는 과정에서 얻는 기쁨,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과 신앙을 공유하면서 느끼는 공동체 의식, 그리고 마음 속에서 초월성과 현실성의 조화에 의한 삶의 충만함으로 정리될 수 있겠다. 이 시작점이 반드시 한 종교 단체 내의 특정 교리만이 진실인지는 필자는 모르겠다. 또한 종교 자체가 와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도 각자의 신념이 어디에 닿아있던 그에 따라 살아가며, 이러한 사람들도 충분히 영성을 가꾸어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즉, 신앙과 영성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고 본다. 초월적인 사랑은 종교를 믿던 안 믿던 햇빛을 내려주고 비를 내려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 억년에 걸쳐 그 초월적인 사랑에 의하여 대를 이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신앙과 영성은 그것이 어디에 닿아 있던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세상이, 문명이 신앙과 그에 따른 영성에 반한다면 - 실제로 불행하게도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 반해 왔던것 같다. - 우리는 이러한 유혹을 이겨내야, 즉 영성을 길러내야 지속 가능한, 의미 있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