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매콤S Feb 06. 2020

선생님, 저 임신했어요

예지의 결정


“선생님, 저 좀 살려주세요.”


예지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항상 생글생글 웃던 아이라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항상 여기 있으니까, 수업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다시 와.”

나쁜 예감이 맞았다. 예지는 더듬더듬 남자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한 살 어린 고등학생이라고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다 만나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사귄 지 석 달 남짓, 예지는 부모님이 안 계신 시간, 어른 없는 빈 집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저는 얘가 처음이에요.”
예지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생리가 나오지 않았다. 서둘러 임신 테스트기를 샀다. 두 줄이었다. 친구와 함께 산부인과를 찾아갔다.
“임신이래요.”

정작 예지는 남자 친구의 학교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가족이 몇 인 지도, 집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엄마가 지방에서 따로 산다고만 알고 있었다.
“남자 친구 엄마가 다 알게 됐어요. 바로 올라오신대요. 이번 일 해결되면 얘 데리고 로 내려간대요.”
“그렇구나.. 남자 친구는 뭐라고 하니?”
“알고 보니까 얘는 처음이 아니에요. 거짓말했어요. 저 말고 전에 다른 여자애도 임신시켰다가 수술한 적이 있대요. 얘 엄마가 다 말해줬어요.”  
예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 부모님은 알고 계시냐 물으니, 고개를 저었다. 아직 말을 못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곧 말할 거라고 했다. 남자 친구와 함께 부모님을 만나겠다는 것이다.


“저, 아기 낳을 거예요.”
“그래, 그렇구나.”
“수술하면 너무 무섭잖아요, 아프고. 나중에 아기 못 낳는다는 이야기도 어디서 들었는데..”

아기 낳는 건 안 무섭고? 이 안쓰러운 녀석아... 나는 몇 마디 말을 속으로 씹어 삼켰다. 예지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손톱 물어뜯는 걸 막으려고 한 행동이었는데, 손끝이 너무나 차가웠다. 나도 모르게 그 까칠한 작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예지는 손을 빼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일단 부모님께 알리자. 그게 먼저야. 그다음부터는 부모님과 상의하는 거야.”
“학교에 다 알려지면 어떡해요?”
“학교는 좀 나중에 걱정하자. 선생님이 평소에 뭐랬지? 네 몸과 영혼은 법적으로 누구 거다?  부모님께 알리는 게 우선인 것 같아.”
예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말씀을 못 드렸어요.”
다음 날, 예지가 찾아왔다. 이유를 물으니 남자 친구가 약속 장소에 오지 않았다고 했다. 예상 못한 바도 아니었지만, 역시나인 남자 친구의 행동에 화가 났다. 하지만 풀 죽은 예지 앞에서 내가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따뜻한 녹차를 한 잔 타 주고, 예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배가 아픈 것 같아요, 선생님. 잠도 쏟아지고요. 임신해서 그런 건가요? 아, 근데 처녀막은 어떻게 된 거예요? 이제 없어졌어요?”

처녀막... 아 처녀막... 난 진심으로 이제 처녀막이라는 단어를 안 들어도 되는 세상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보건수업 때 학생들에게 ‘총 각막’은 없는데 왜 ‘처녀막’은 있어야 하지? 하고 물으면 다들 까르르 웃는다. 또한 아이들에게 ‘막’이라고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니? 하고 물으면 다들 막혀있거나 덮여 있는 형태를 상상한다. 그러나 처녀막은 그런 모습이 아니다. 우리 몸의 어느 부분이라도 그 모습을 그려보라고 하면 그릴 수 있다. 눈은 어떤 모습이지? 코는 어떤 모습이지? 귀는? 손은? 그 어떤 부위라도 그려보라고 누군가 요구한다면 갓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아이도 어떻게든 그려낼 수 있다. 그러나 처녀막은 그렇지가 않다. 교과서적인 해석을 보면, 처녀막이라고 하는 것은 여성의 질 입구에 위치한 주름 또는 막 모양의 조직을 말한다.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있는 조직이다.

나는 처녀막이란 질 말단의 특정한 모양을 설명할 수 없는 불명확한 조직을 ‘처녀막’이라 이름 짓고, 여성에게만 설명하기 어려운 어떠한 의무를 부여하려는 생각으로 생긴 분류라고 생각한다. 해부학 책에 나와있는 처녀막의 그림은 2-30가지가 넘는다. 기둥모양, 그물 모양, 둥그런 고리 모양, 태그라고도 하는 꼬리가 달린 듯한 모양 등이며 흔히 상상하듯 아예 막혀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참으로 완전히 막으로 덮여 있는 경우 정상적으로 분비되는 질 분비물 등이 배출되기 어려워 시술이 필요할 수도 있다.

나는 2004년 우리나라에 처음 개소한 해바라기 아동센터의 성폭력 전담 간호사로 근무를 했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의료기관 중 하나인 신촌 세브란스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피해아동들을 데려가 연간 200여 건의 산부인과 진료를 진행했을 때, 단 한 번도 처녀막의 소실 및 변화에 대한 명확한 진단서를 받은 바 없다.

예지에게 중요한 것은 처녀막이 아직 있느냐 없느냐가 아닌 것이다.
나는 예지에게 임신 및 임신 기간 중에 있을 변화 등에 대하여 간단히 교육하고, 잘못된 지식들을 바로잡아 주었다.

예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선생님, 만약에 제가 아기를 낳으면... 학교는 어떻게 해요?”
“솔직히 말할게, 예지야. 임신 사실이 학교에 알려진 다음에는 많은 변화가 있을지도 몰라. 아기 아빠도 아직 너처럼 어리고, 책임감도 없어 보이네. 네가 아기를 낳을 마음이라는 사실이 기특하다만, 이건 네 인생을 건 결정인 것도 사실이야.

네가 아기를 낳기로 결심한다면 너를 도와줄 단체들은 많이 있단다.”


예지는 아기를 낳는 쪽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최대한 지지하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는 지금 임신부야. 졸리고 피곤한 게 당연해. 그럴 때는 참지 말고 보건실로 와서 쉬어.

하나만 약속해 줘. 오늘은 혼자라도 부모님께 반드시 알려야 해. 만약 오늘도 알리지 않으면 선생님이 직접 엄마한테 말씀드릴 수밖에 없어.”
예지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기운 없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보건교사의 입장을 넘어서 같은 여성의 마음으로 그 아이가 안쓰러웠다. 혼인 등의 과정을 거쳐 가정의 모습을 갖추었어도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드는지를, 자식을 낳아봤건 아니건 잘 알 것이다. 아이 하나 기르는데 6억이 든다, 7억이 든다는 말은 무책임한 말이다.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다. 자식을 낳아 기른다는 것은, 이전에는 몰랐던 나의 초능력을 찾아내는 일이고, 그 초능력의 대부분을 자신이 아니라 자식을 위해 쏟아내는 것이다.

내가 도와줄게. 혼자가 아니야. 뱃속 아가의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너는 아름답단다. 나는 흐릿하게 사라지는 예지의 뒷모습에 대고 중얼거렸다.




작가의 이전글 집도 학교도 다 싫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