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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한결 Sep 08. 2021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사람들

1.

2021년 8월 26일 목요일, 2학년 독서 교과의 도서관 활용 수업시간이다. 도서부인 학생 망고가 자연스럽게 데스크에 앉아 반 아이들의 대출을 도와준다. 지금은 수업시간이라 봉사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역시 도서관이 제일 편하네요"


망고는 문정인의 피가 흐르는 새싹임을 이 날도 다시 한번 실감했다. 평소 사서교사가 되고 싶다며 많은 질문을 했던 망고다. 망고와의 대화는 여러 가지로 편한 느낌을 준다. 여러 각도와 깊이를 가져서 가끔은 인터뷰하는 느낌이 든다. 교사를 희망하는 망고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싶어서 교사가 되고 싶은데 티오가 불안정하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지 않냐고 말했다. 사서교사에 대한 애정을 질문으로 풀어내는 망고와 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중에 사서교사가 되어서 나를 찾아오겠다는 망고. 내가 이 지역에 있을 때 망고가 찾아올 수 있을까? '대학 졸업하고 임용고시 붙고 하면 몇 년이지' 손가락으로 해를 가늠하며 연도를 세어본다. 한 번 말고 평생 찾아오겠다며 깔깔 웃는 망고. 언제든 환영이라고 하는 나. 정말 그런 날이 올까? 내 제자가 사서교사가 되어서 동료로 만나게 될 날이. 그때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선생님 나중에 책 쓰시면 되게 잘하실 것 같아요"


망고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종류의 책일까 싶어서 무슨 책? 하고 물으니, 왜 교사들이 교단에서 일어난 일들로 이야기를 쓴 경우가 있지 않냐고 한다. 내가 그런 책을 잘 쓸 것 같다고 한다. 가끔 망고의 질문은 다정한 가운데 매서운 기운이 종종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떻게 알았지'. 매일 교단일기를 쓰는 이유를 숨긴 적도 없는데 왠지 들킨 기분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자료를 차곡차곡 모아야겠네. '오늘은 망고가 나더러 책을 써보라고 했다. ~~' "


일기를 쓰는 시늉을 내며 이런 말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경험이 더 쌓이면 그때부터 책을 써보려고 교단일기만 꾸준히 작성했었다. 그런데 망고의 말을 곰곰 생각해보니, 지금 겪는 우당탕탕한 일들도 공유하면 좋을 듯했다. 망고는 이래 저래 나와 대화의 결이 비슷해서 이야기를 나누면 편안한 기분이 들 때가 많다. 대화에 참 소질이 있는 친구다. 나를 보고 사서교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준 것도 너무 감사하고. 교단일기의 몇 줄을 편집해서 올려볼까 생각한 것도 이 날 망고의 말 덕분이다.


망고는 이 외에도 나에게 엄청난 말을 많이 남겼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작년 12월이었다. 망고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저도 나중에 사서 교사할래요"


"왜?"


"도서관 올 때마다 샘이 맨날 웃고 있어서요"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더 받았을 작년이었다. 코로나 사태로 모든 것이 정해질 수 없는 아비규환의 상태였고, 나는 아직 내 포지션이 익숙하지 않아 학생들에게 낯을 가리면 더 가렸던 생 날것의 신규 교사였다. 그런 나날 중에 망고가 내게 저런 말을 했다. 내가 좋아 보여서 사서교사가 되고 싶다는 말. 그 말을 화두로 사서교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오기 시작했다. 진로는 어떻게 뻗어나가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직업의 특성과 본인의 적성에 대한 이야기를 낱낱이 나누었다. 망고 외에도 딸기, 사과, 귤, 라임이가 삼삼오오 모여 함께 종알종알 이야기를 했다. 그날은 온종일 마음에 먹먹한 울림이 가득 찼었다.



2.

망고와 같은 모습을 풍기는 아이가 도서부에 또 있다. 바로 자몽이다. 1학년 국어 수업 도서관 활용 수업 시간.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도서부는 도서관에 들어서면 그들만의 특별한 사명감이 자랑스럽게 드러나는 모양이다. 임무를 마치고 자몽은 쪼르르 내 곁으로 왔다.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책 읽는 것도 정리하는 것도 좋아하는 자몽이다. 데스크에 있던 '성균관대 고전 100선' 목록에 관심을 보이기에, 고3 에게는 할 수 없는 농담을 던졌다.


"이거 다 읽으면 성균관대 갈 수 있대~"


대개 허망하게 웃거나, 본인이 안 가겠다고 새침을 떨거나, 오히려 과장되게 정말요? 우와, 하며 나의 농을 받아주는데, 자몽이에게서는 예상치 못한 반응이 등장했다.


"전 안 가요! 저는 샘 후배 될 거예요!"


이 귀여운 선언이 뭐라고 심장이 아득해졌다. 사실 내가 다닌 대학교명과 학과명까지 아주 정확하게 말하며 선언했다. 나는 자몽이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똑같은 길을 가겠다는 자몽이에게 자꾸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이번엔 대학 학과까지 연결해서 자몽이는 어떤 책을 읽을지 학과별 도서 추천 목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몽이가 여간 꼼꼼한 게 아니다. 문정인의 피가 흐르는 또 하나의 새싹임을 실감하고, 난 홀로 은밀하게 왠지 모를 대견함에 취했다. 나중에 우리 도서부였던 학생들이 내 후배가 되고 같은 업계 동료가 되면 어떨까. 아이들이 나를 보며 꿈을 가져주어서 정말 기쁘다. 오히려 고맙다. 나를 좋은 사람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어서. 그리고 표현해주어서 참 고맙다.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일을 가까이 다가와서 표현해주어서 참 고맙다. 그 좋은 마음을 나도 함께 느낄 수 있게 말해주어서.




3.

작년에 졸업한 도서부 학생 중에 코코넛이 있다. 내가 발령받기 전, 코코넛이 2학년일 때 도서부의 우두머리(회장)였다. 내가 발령받아 왔을 때 코코넛은 이제 연로한 고3이 되었다. 도서부의 우두머리 자리를 물려주고 간간히 공부에 취하다 한 번씩 도서관에 올 때면 사소한 대화들을 나누곤 했었다. 코코넛은 사범대를 갔다. 한 번은 대학교 여름방학 때 학교를 찾아왔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움에 잔뜩 반겼다. 코코넛은 고민이 있다더니, 사서교사가 되고 싶다고 고백했다. 마침 내가 다닌 대학교에 입학해서 더욱 반가웠다. 사범대가 문헌정보학과를 복수 전공할 수 있는지는 잘 몰라 조교에게 문의해야 한다고 알려주며, 문헌정보학과에 가면 주로 어떤 걸 배우는지, 코코넛의 적성에 적합할 지에 대해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난 또 한 번 문정인의 피가 흐르는 새싹을 마주했다. 코코넛은 잔잔하게 말하면서 묵직하고 실속 있는 질문들을 했다. 오히려 내 답변이 엉성하다 느낄 정도로 진중한 아이였다. 더 도움이 되고 싶어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이제 내 대학교 후배가 된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 설렌다. 개강할 즈음에 코코넛에게 아주 귀엽고 정중한 문자가 왔다. 곧 수강신청인지 강의에 관련된 질문을 해왔다. 온 마음을 다해 빼곡히 문자를 보냈다. 빼곡한 답장이 돌아왔다. 나는 코코넛이 고생스러워도 즐겁고 의미 있는 대학생활을 보냈으면 좋겠다. 그것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알고 있는 것을 아낄 이유가 없었다. 꼼꼼히 듣고 메모해주는 코코넛에게 더없이 감사할 뿐.




4.

누군가가 나를 보고 본인의 미래를 그린다는 생각이 일상을 얼마나 설레게 해 주는지 모른다. 그래서 자꾸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나를 자꾸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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