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 검열과 세대, (2022. 7월의 마음)
0.
무언가를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에, 그것이 과연 정말 그런가 라는 생각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무 글도 적지 못하는 상태가 있다. 지금 내 상태가 그렇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문제가 가장 크고 힘들고 어렵다고 느껴져서 괴로웠는데, 사실 알고 보면 그냥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항상 처음이 어려운 이유는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서 온다.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그걸 재미와 즐거움으로 전환시켜 즐기는 자세도, 실은 처음을 여러 번 겪은 경험에서 나온다. 그래서 처음은 처음이라는 이유만으로 큰 걱정거리가 된다. 걱정의 특성이 그러하듯, 별 거 아닌 일도 걱정을 통해 세상에서 제일 크고 힘든 일이 된다. 기우가 주는 불편함과 불합리함을 자주 느껴왔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또 사람의 마음.
뭔가를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것을 좋아하지만, 늘 처음이라는 이유로, 깨닫는 재미와 즐거움은 모르는 상태가 주는 중압감과 함께 온다.
올해는 새로 맡은 직책에 따른 일들이 알감자처럼 우르르 딸려 나와 당황스러움을 가득 안고 시작했다. 유난한 처음이 많아서 마음이 혼란했던 계절들이었다. 벌써 두 개의 계절이 지났고, 여름의 절정을 지나 경계에 서있다. 얼추 해내고 싶은 게 아니라 '잘' 해내고 싶은 마음에 온 마음이 기울었고, 그만큼 스치는 생각이 많았다. 어쩌면 이런 마음을 예민하다 표현하는 걸지도.
학교 안에서도, 밖에서도 새로운 일이 가득했다. 늘 같은 일을 한다면 몸은 편하겠지만, 교육이란 것은 사회적 내용이 아주 긴밀하게 접목된 분야라 늘 같은 내용일 수가 없다. 아이들이 세상에 적용하려면 가르치는 사람이 늘 공부를 게을리할 수 없는 일이었다. 늘 바뀌는 세상을 읽고 맥락을 짚어 적용해야 했다. 독서 프로그램과 도서관 일도 마찬가지다. 늘 하던 대로 하면, 목적에 맞지 않아 결국 마음이 불편한 일이 된다.
같은 직업인으로, 사서교사의 역할에 대해, 업무에 대해 공유하고 연구하기 위한 많은 모임에 합류했다. 더 잘 해내고 싶은 마음에 각종 연수와 교육에 참여하려 방방곡곡을 누볐다. 그것은 한 학교에 1명뿐인, 어쩌면 그 1명도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이고 최고의 방법이었다. 측근에서 누군가 바로 알려줄 수 없는 전공지식을, 어쩔 수 없이 학교 밖에서 스스로 체득해야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일이었다. 그러니 더 의미가 깊을 수밖에.
집단지성이 주는 힘은 늘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한다. 사서교사들끼리 모여 업무적 논의를 한다는 것은 때론 삶의 유익함이 되기도 한다. 그 중심에 책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마다 생각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으로 성장하는 모임과 교과를 연구하는 모임들로 함께 시작한 한 해였다. 더불어 이제 막 사서교사를 시작하려는 사람들과도 녹진한 성장통을 함께 나누게 되었다.
새로운 일이 많다는 것은, 그래.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늘 재밌는 일만은 아니다.
1.
내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될 때, 그것이 늘 긍정적인 생각은 아니다. 불평불만스러운 질문이 떠오를 때에도,
-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사실 내가 잘 몰라서 그런 거 아닐까? 의미 있는 지적이 아닌 무지한 비난으로 비치는 건 아닐까?
고민했다.
얕은 경험으로 뱉은 말이 누군가에게는 우습게 들릴 터.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운 다음에야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질문을 막는 건 오히려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확신이 있다면 질문할 필요도 없을 텐데. 부끄러워질 질문에 대한 용기가 필요했다.
지나친 자기 검열은 객관인가 비관인가.
2.
보고 배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알려주지도 않아놓고, 왜 이러지 않았느냐, 서러움을 안겨주는 일에 많은 억울함을 가지고 살았다. 하지만, 어딘가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매뉴얼은,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알려주고 싶은 사람이 알려주려 해도, 어디서부터 알려주기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게 만들고, 배우려는 사람도 본인이 어디까지 모르는지 알지 못해,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지 모르게 만든다.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질문이 사라지면 품게 되는 건 결국 어떤 마음일까. 흔하게 긋는, 세대를 가로지르는 단어들과 닮지 않았을까.
알려주지도 않아놓고 혼이 나는 억울한 상황에도 처해봤고,
알려주는데도 내 말이 들어가 먹지 않는 상황에도 놓여봤다.
원하지 않는 배움은 할 때도 당할 때도 곤란함과 피곤함을 주었다. 그래서 뭔가를 이렇다 저렇다 말할 때, 정말 그런가 망설이는 것은, 곤란함과 피곤함을 당면하지 않기 위해, 원하지 않는 배움에 대한 낯가림으로, 어쩌면 조금 타당한 일인 듯하다.
원하는 배움은 무엇일까.
원하는 배움만 가치가 있을까?
스스로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알고 있을까.
사실 원하는 배움이 아니었을 때 얻게 된 것들도, 내가 원했던 것보다 더 큰 의미와 깨달음이 되었을 때가 많다. 그것이 바로 느껴지든 아니든. 조금씩 쌓여 어느 순간 드러났을 때, '역시 알아둬서 나쁠 건 전혀 없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공부란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굉장히 포괄적으로 변해가기 때문이다. 지면에서 발화로, 유형에서 무형으로, 실제에서 추상으로. 어쩌면 모든 것이 그래서 어려운 느낌으로. 원하는 배움이 원하지 않는 것으로 바뀌는 것은 한 끗 차이고 그 반대가 되는 일도 아주 순식간이었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 사람의 마음과 말에 얼어붙기도 녹아내리기도 했다. 안 그래도 정답이 없는데 기껏 찾은 정답 같은 것을 인정하기 싫게 만들어 버리거나, 아니어도 우기고 싶게 만들어버렸다. 처세술도 하나의 공부였다.
사람마다 말하는 게 다르고 매일 새로운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정답이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세상에 만고불변한 것이 과연 있을까? 그러니 일에도 사람에게도, 정제된 매뉴얼이나 사전은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은 사람마다 너무나 달랐다. 같은 사람이어도 어제와 오늘이 달랐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적당히, 눈치로 통용되는 언어로, 알아서 질문하며 알아서 답 같은 것을 가름하며, 가닥을 쳐내야 했다. 그렇게 내게 맞는 적절한 해답을 찾아야 했고, 그것을 모아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업무적 지식이든, 처세술이든.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이 궁금한지 알아야 했고
무엇이 궁금하다 질문해야 하는 것이었고,
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는 뭘 모르냐 질문을 해야 했고
질문의 요지를 파악해야 했다.
그리고 아주 잘 들어야 했다.
사람들은 아주 다양한, 종류와 분야가 무수한, 각종 참고서적들 같아서, 때론 그 책의 주제와 핵심 내용을 파악하며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주제로 어떤 핵심 내용을 가지고 말하는 서적인가? 나의 목차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3.
자기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잘 표현하고 있는가?
아니, 잘 질문하고 있는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꺼내지 못한 말과 글이 얼마나 많은지.
말하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방향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기성의 방식을, 개성과 다름을 앞세워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일을 자주 목격한다. 자신의 맥락에 맞지 않으면 TMI라고 무안을 주는 일과 어려서 뭘 모른다며 주장을 고집하는 일은, 닮았다.
나와 마음이 맞지 않는다고 틀린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이다.
하지만 나와 마음이 맞지 않는다고 다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틀린 것도 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는 말을, 남용하고 있다.
틀린 것과 다른 것은 다르다.
틀린 것을 다르다고 주장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한 이유로,
내가 틀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무언가를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 전에, 그것이 과연 정말 그런가, 라는 생각이 들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무 글도 적지 못하는 상태가 있다. 지금 내 상태가 그렇듯이.
어쩌면 말을 하는 용기는, 표현하고 질문하는 것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오는 것 같다. 내가 틀렸음을 모두가 알아도, 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부끄러움이든 창피함이든, 그걸 무릅쓸 수 있는 마음. 거부당할 수 있는 마음.
오류를 수정하는 마음은 그래서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질문하는 일은 그래서 상당히 용감한 일이다. 무언가를 시작하고 배우는 일에, 온전히 즐거움과 새로움을 느끼려면, 결국 어쩔 수 없이 동반되는 두려움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일을 자꾸 만들어야 했다. 그 시작이 되는 것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
그럼에도 질문하고 대화하는 마음.
사실 배우는 사람은 용감한 사람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