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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한결 Jun 18. 2021

감정의 영향

2020. 8. 21. 로부터,



지독한 장마와 열기에 마음이 녹초가 된 하루였다.

아무 이유 없이 입맛이 없었고 어떤 일이든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바쁜데 바쁘지 않고 싶어서 생각하기를 멈춰버렸던 하루가 진행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쉬는 시간에 책 빌려도 되냐는 아이들에게 투박하게 굴었다.

눈치 빠른 아이들의 경우 다른 때보다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것이 느껴졌다.

장난을 치려다 말고, 질문도 더 수줍게 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기분이란 게 내키는 데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이 아니란 것만 알아갈 뿐이었다.


지겨운 오후. 지나가던 3학년 학생 하나가 도서관 문을 슬쩍 열고 한마디를 툭 던지고 갔다.

"쌤 파이팅~~"

오늘 한 번도 도서관에 오지 않았는데 내 기분을 알았을 리가 없는데.

누군가 툭 던진 한마디에 기분이 동전 뒤집듯 쉽게 바뀌었다.

꽤 괜찮은 하루였다.


- 2020. 8. 21.






마음이 곤란하면 당연히 그러하고

몸이 불편해도 그러해질 수 있음을 느낀다.


피곤하면 나도 모르게, 평소에 자주 듣는 질문이 '같은 말의 번복'이라는 생각에 짜증이 앞서려는 때가 있다.

내가 매일 누누이 말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오려는 찰나가 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처음 질문하는 것인데, 나는 자주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아이는 10번 물어본 것 같은 대답을 들어야 한다.

내가 학생 때 제일 싫어하던, 지금도 가장 싫어하는 일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행동을 나도 모르게 할 뻔했을 때, 깜짝 놀랐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숨이 멎었다.

나는 한 명이고 학생들은 여럿인데, 내가 매일 누누이 말해야 그 아이들이 생각이 자라고 마음이 바뀌는 거 아닌가.

한 번에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마음이 어리석었다.


티끌을 모아 태산도 만드는데, 자꾸 말하다 보면 언젠가 태산같이 모인 아이들이 나의 말을 전달해주지 않을까. 그러면 제자리에 고여있던 일들도 낮은 곳으로 흐르고, 각자 다른 길을 걸어온 아이들이 모여 바다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그 안에는 나의 말이 아이들의 말과

함께 섞여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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