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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고르 Jan 24. 2022

네팔에서 최초의 한국인 버스커가 된 사연

뭐든지 최초는 기분이 좋다.

미래가 늘 궁금하고 기대됐던 나의 20대.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재밌는 게 없는지 염탐하던 나란 녀석은 또 하고 싶은 것이 생겨버렸다. 이제 남들에게 들려줄 정도의 기타 실력이 되었으니 거리로 나가보자는 것이었다. 노래는 고등학생 때부터 취미로 하고 있었고 통기타도 알음알음 배워 몇 곡 정돈 칠 수 있는 실력이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할 줄 안다고 해서 누구나 버스킹을 결심하는 건 아니다. 난 좀 더 자극적이고 화려한 경험을 원했던 것 같다. 자신감이 아주 충만했던 게지.


버스킹을 하려면 장비가 필요하다. 통기타, 마이크, 마이크 거치대, 앰프, 잭 등이다. 당시 23살 대학생이었던 나에게 장비를 살 돈은 충분하지 않았다. 빠른 시일 내에 가장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알바를 알아보았고 야간 물류센터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을 죽도록 일해서 번 돈은 100만 원. 이 돈이면 버스킹 준비물품을 사기엔 충분했다.


버스킹 장비들을 사서 처음 시연했을 때가 생각난다. 생목으로 부를 때보다 앰프를 통해서 듣는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성시경 마냥 부드럽고 이뻐서 놀랐다. 이 정도면 울 집 앞에 지나다니는 여고생 몇쯤은 내 팬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부푼 망상과 함께 첫 공연을 하러 장비를 들고 집 앞 동네 공원으로 향했다. 앰프를 어디다 둬야 할지, 마이크는 어떻게 설치할지 등 초보 버스커에겐 장비 세팅부터 난관이었다. 어찌어찌 준비를 완료하고 노래를 부르는데 그 순간의 짜릿함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유동인구가 있을 수가 없는 동네 공원에서 버스킹을 한다고 사람들이 모일까 싶었지만 두 곡, 세곡을 부르고 나니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들은 어느새 내 주변을 꽉 채웠다.

내 최초의 버스킹 사진.. 너무 오래돼서 화질이 구리다.

버스킹 첫 성공 경험으로 시작해서 29살까지 6년간의 버스킹 인생이 시작됐다. 좀 더 큼지막한 공원, 광안리, 해운대 순으로 무대를 넓혀갔다. 횟수가 점점 쌓임에 따라 관객을 대하는 여유가 늘어나고 장비 세팅 속도는 빨라졌으며 할 수 있는 곡 수도 많아졌다. 버스킹에 이렇게 조금 익숙해질 때쯤, 나에게 기회가 한, 둘 찾아왔다. 나에게 공연 제안이 온 것이다.


공연 제의는 다양한 단체로부터 왔다. 청년들이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버스킹 프로젝트에서 제의가 온 적도 있고 대학교 기숙사 축제에도 불려 갔다. 이는 내가 버스킹을 한다는 것을 아는 내 주변 지인들의 추천이었다. 지루함을 환기시키기 위해선 어느 행사든 공연이 필요했고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는 내 공연은 좋은 먹잇감이었을 테다. 하지만 관객이 있는 곳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자체가 좋았던 시절이기 때문에 노페이 공연은 아무 상관없었다.

사회복지기관 축제에서 한 곡 때림

나에게도 대학교 졸업 시기가 다가왔고 진로를 찾기 위해서 네팔로 해외봉사를 떠났다. 네팔에 있는 동안 아이들에게 체육과 음악을 가르쳤다. 일을 해야 하니 한동안은 공연을 하지 못하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네팔 노래가 생각보다 한국 가요스러운 것들이 많았고 버스킹 시도에 대한 아이디어가 스멀스멀 피어났다.


네팔에서 버스킹을 하려면 여러 가지 요건들이 필요했다. 네팔엔 '버스킹'이란 단어가 없을 정도로 대중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나라였다. 거리공연이라고 하면 네팔 전통악기들을 앰프 없이 길거리에서 연주하며 돈을 버는 앵벌이? 그런 것들만 있었다. 앰프와 마이크, 기타 등을 다 갖추고 거리에서 보컬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상황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엇, 그럼 내가 버스킹을 시도하게 되면 한국인으로서는 첫 번째 버스커인 건가?!'


내 노래가 네팔 사람들로 하여금 자국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진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BTS가 온 세계를 휩쓸어 온 나라 사람들이 한국어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볼 때면 왠지 모를 국뽕이 차올랐던 내 경험처럼 말이다. 언어도 피부도 다른 한국인이 네팔어를 하는 것도 신기한데 거리에서 네팔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면 그들은 어떤 느낌을 가질까. 버스킹이란 문화를 가지고 그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전쟁에 나가는데 총이 없으면 어떡하나. 버스킹을 하려면 장비들이 필요했는데 내가 살던 촌 동네에는 앰프는커녕 기타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도 바로 옆 '포카라'라는 여행자의 도시에 필요한 장비들을 판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 내가 국가에서 받던 생활비는 한 달 50만 원. 이것은 온전히 내가 계획하는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내 사비를 들여야 했다. 장비 값이 만만치가 않았다. 버스킹을 위해 준비했던 3개월 동안 열심히 생활비를 모아 통기타부터 구입하기 시작했다. 


네팔어는 지독하게 어려운 언어였다. 노래를 맛깔나게 부르려면 기본적으로 가사의 의미를 알아야 했지만 일상 네팔어도 제대로 못했으므로 들리는 대로 외워야 했다. 어렸을 적 영어의 '영'자도 모를 시절에 알파벳보다 팝송을 먼저 배우지 않았던가. 네팔 노래 연습은 의도치 않게 네팔어 공부가 됐고 난 자연스럽게 다른 단원들보다 네팔어를 좀 더 잘하게 됐다. 


그렇게 버스킹 준비를 3개월쯤 하던 중 내가 속한 NGO에서 단기 봉사단원을 파견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들은 약 3주 동안 네팔에 머물면서 한국 음식을 파는 프로젝트를 한다고 했다. 계획을 듣고 곧바로 '드디어 내가 나설 차례 군!'이란 생각이 들었다. 버스킹을 하면서 프로젝트를 홍보하기로 했다. 마침 장비들이 다 모였고 노래는 9곡 정도 준비돼 있었다. 혼자 노래하면 재미없으니 단원들에게 네팔 전통 타악기 연주를 부탁했다.


거리공연이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던 동네여서 장소 협조부터 걱정이었다. 앰프를 사용하기 때문에 소음으로 주위 상권에 피해가 되면 안 됐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사거리에서 공연을 하기로 했고 시장에 하나밖에 없는 폰 대리점의 사장님에게 조심스럽게 허락을 구했다. 


"저.. 여기서 공연 좀 해도 될까요?" 


"틱쳐!!!!!(OK!!)"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OK 사인. 이 동네에 사는 한국인은 자국을 도우러 왔다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별 의심 없이 허락하신 것 같다. 한국에서 버스킹을 시작하기 전 익숙하게 했던 장비 설치. 캐리어에서 장비들을 주섬주섬 꺼내어 설치를 시작하니 그때부터 사람들이 한, 둘 모였다. '음, 음,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네팔의 한적한 시골 시장 바닥에 울리는 한국어. 드디어 한국인으로서의 최초 버스킹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언 댜로 쳐요 라떠 아저밀레~~♬"


앰프에서 네팔 노래가 울려 퍼졌고 공연을 지켜보는 동네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농사로 먹고사는 네팔 안에서도 쩌~기 구석에 위치한 '바글룽'이란 지역에서 네팔어로 노래하는 한국인은 그들에게 어떻게 비쳤을까. 


"저는 홀리차일드 스쿨에서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있는 한국인 선생님입니다. 우연히 네팔 노래를 들었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공연을 하게 됐습니다.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총 9곡을 노래했고 한국의 '아리랑'처럼 모든 국민이 다 아는 네팔 전통 노래를 불렀을 땐 의도치 않은 떼창(?)을 경험했다.


"렛썸 삐리리~ 렛썸 삐리리~ 우레러 정키 달레마 거챠 ~♬"


네팔에서의 첫 버스킹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이후로 난 동네에서 대스타(?)가 되어 거리를 다닐 때면 다 나를 쳐다봤고 어느 음식점을 방문해도 사장님을 나를 알아봐서 음식 할인을 해주는 바람에 생활비를 아낄 수 있게 됐다. 동네가 매우 좁아 내 버스킹 이슈는 금방 퍼졌다. 한국에서도 그랬듯, 동네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나에게 공연 제의가 들어왔다. 그때마다 기꺼이 공연을 해줬다.


동네 축제에 버스킹 나간 가짜사회복지사

동네에서 몇 번 공연을 하고 나니 난 좀 더 큰 무대를 원했다. 지프차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3시간 정도 달리면 '포카라'라는 여행자의 도시가 있는데 거기서 버스킹을 해보고 싶었다. 포카라에는 유명한 '페와호수'가 있었고 그 호수를 배경으로 낭만적인 공연을 해보고 싶었다. 매일 보던 동네 사람들 앞이 아니라서 다소 긴장했었지만 이내 버스킹을 성공했다. 학교가 방학일 땐 아예 포카라에 몇 주간 살면서 버스킹만 하면서 재밌는 나날을 보냈다. 


네팔에서 버스킹을 시도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한국에서의 풍부한 버스킹 경험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시도였다. 내 안에 있었던 반짝이는 점이 우연히 연결된 느낌이었다. 학창 시절을 그저 학업과 취업 준비를 위해 생산적으로만 보냈더라면, 음악을 하지 않았더라면,  네팔에서 이런 값진 경험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 저런 스펙터클한 경험은 더 이상 있을 수 없겠지. 그래서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경험이다.



*쿠키 영상*

네팔 '포카라'에서 버스킹한 실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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