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잊혀지지 않을
사회생활이고 뭐고 아무것도 몰랐던 신입 시절.
당시 나는 패기가 넘쳤던 신입 복지사였기 때문에 학교에서 배웠던 여러 가지 사회복지 이론들을 그대로 현장에 적용하려 했었다. 하지만 현장은 이론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고 심지어 지역주민에게 피해가 될 수도 있는 방향으로 가는 프로젝트들이 더러 있었다. 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정확히 짚고 넘어가려고 했고 그 대상이 심지어 상사라 할지라도 괘념치 않았다.
"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우리 복지관에 어울리는 복지사는 아닌 것 같은데요?"
"저는 제 의견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한 번은 과장이 내 프로젝트에 대해 슈퍼비전(피드백)을 줬는데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아서 동의하지 않고 다른 의견을 말한 적이 있다. 과장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내가 탐탁지 않았는지 '선생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우리 복지관에 어울리는 복지사는 아닌 것 같은데요?'라는 개썅 말 같지도 않은 상사로서 뱉으면 안 되는 말을 했다.
상사들은 이런 식이다. 논리로 밀리면 권력으로 누른다. 도대체 그 복지관에 어울리는 복지사는 누구였는지는 모르지만 갓 들어온 신입에게 저딴 소리를 할 정도면 정상적인 정신머리는 아니었던 걸로 보인다. 복지관마다 고유의 비전과 철학이 있다고는 하지만 입사한지 3개월도 안된 신입이 도대체 뭘 알겠는가. 상사라면 뭘 모르는 신입을 옳은 길로 인도해 줘야 마땅하다. 저런 말로 부하직원에 상처를 줄 게 아니라.
과장은 그 뒤로 점점 더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다른 직원들과는 달리 나를 차갑게 대했다. 그러다 꼬투리가 잡히면 전투태세를 취했다.
"정훈 샘! 지금 공유 엑셀에서 내 이름 지웠어요?!"
"네?"
"아... 과장님 그거 제가 방금 실수로 지웠습니다."
"...."
한 번은 내 옆 팀장이 저지른 실수를 내 탓으로 착각하여 뭐라 하려다 머쓱해지는 상황도 있었다. 물론 과장은 이 팀장에겐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상사에게 찍히니 더 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사사건건 감시당하는 기분이었고 결재받으러 가기가 스트레스였다. 다른 동료들과는 차별 대우를 받는 것도 굉장한 소외감이 들었다. 결국 난 퇴사를 결정했다. 별 미친 상사 때문에 생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게 미치도록 분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직하는 것이 나에게 좋다는 결론이었다.
"과장님. 저 할 말이 있습니다. 잠시 면담 요청드려도 될까요?"
"그래요."
[상담실]
"저..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 퇴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
그래도 6개월 동안 이 복지관에서 14시간 야근하며 열심히 일했는데 퇴사한다고 하니 과장은 심정이나 퇴사 이유도 묻지 않고 단답형으로 면담을 끝내버렸다. 예상은 했었지만 생각보다 더 심플한 퇴사 수용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렇게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니 과장에 대한 실망감은 더 하늘을 찔렀다(하지만 그 뒤 관장님은 나의 퇴사를 받아주지 않고 두 번이나 붙잡았다).
이 답도 없는 인간을 경험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결국 사회복지서비스도 사회생활이 기반이 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직장동료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지역주민에게 양질의 복지 서비스를 줄 수 없다. 인간관계의 불협화음은 나에게 하여금 큰 스트레스를 줄 거고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좋은 서비스를 줄 수 없다는 생각이다. 결국 상사의 비위를 잘 맞춰야 한다는 뜻이며 필요하다면 나를 감춰야 한다.
분하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
난 보통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이런 안 좋은 기억들이 날 때가 있는데 이 과장이 나에게 했던 발언들과 과장이 지었던 표정, 말투, 그리고 그녀의 발자국 소리까지 기억날 때가 있다. 타인에게 준 상처는 이토록 오래 남는다. 언젠가 과장이 자신이 타인에게 준 상처를 그대로 돌려받기를 저주한다. 그것이 정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