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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정 Jun 03. 2020

결혼 10년차에 백마탄 왕자는 없다는 걸 알다.

믿을 건, 나 하나 뿐

희뿌연 하늘을 뽐내던 어느 날. 아침 일찍 바깥을 나갔다. 평소 주말은 남편에게 아이를 봐달라고 말을 하고 밖을 나간다. 한두 시간의 커피 타임이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즐기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만의 방법을 찾는다. 매일매일. 어느 요일의 주말에도 그랬다. 전날 둘째 아이가 이불에 오줌을 싸서 덩치 큰 이불을 집에 있는 세탁기에 돌릴 수가 없어 찾아낸 방법이 집 근처 빨래방이다.

사실 이전에도 빨래방을 찾은 적이 있다. 둘째 아이가 갓난아기 티를 벗어나던 무렵, 나는 첫째 아이와 만화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굽굽한 여름 장마철 기간이었다. 하루 종일 내리는 비에 빨래를 건조하기가 어려웠다. 날 좋은 날 햇볕에 빳빳이 잘 말린 옷들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축축한 공기에 제대로 마르지 않는 빨래에서 나는 걸레 냄새가 난 싫었다. 그래서 기어이 빨래방을 가고 말았다. 커다란 코스트코 가방에 빨래들을 한 짐 넣고 꾸역꾸역 차까지 운반해왔다.


집 근처이긴 하지만 무거운 빨래 더미를 안고 걸어갈 수는 없으니 차에다 실었다. 빌라들이 많은 좁디좁은 골목길을 지나 한 건물 앞에 주차하고 빨래 더미를 꺼냈다. 이미 한 차례 빨래를 돌린 축축한 옷가지들을 건조기에 넣고 4500원 , 500원짜리 동전을 9개 투입구에 넣었다. 그리고선 빨래가 잘 건조될 때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근처 한 번씩 가는 카페가 있는데 그곳에서 우아하게 커피도 마시며 시간을 때우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계획은 무색하게 카페가 문을 닫은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빨래방에 죽치고 기다리는 수밖에...

그렇게 1분, 2분, 10분, 20분을 시간을 가기를 기다렸다. 핸드폰을 봐도 재미가 없었다. 그 사이 내 첫 아이는 집에 놀러 온 이모와 함께 만화카페를 이미 간 뒤였다. 아이가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몇 분이 남았지만 아이들이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져서 정지 버튼을 눌렀다. 겉으로 봐도 건조가 거의 다 된 것 같았다. 건조기에서 꺼낸 옷들은 뽀송뽀송했다. 기분이 좋았다. 굽굽한 날, 굽굽한 내 마음도 이렇게 건조기에 넣고 돌려버리면 깨끗하고 뽀송뽀송한 마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분이 좋은 틈을 느낄 새도 없이 정신없이 옷가지들을 개키고 정리한다. 이미 가지고 온 코스트코 가방에 옷가지들을 챙겨 넣는다. 급하게 차에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그 사이 표정이 안 좋았던 남편을 바라보았다. 둘째 아이를 봐야 해서 힘이 들었나 보다. 그건 육아의 공동책임이 아니던가? 그런 구겨진 인상을 하고 있는 남편에게 둘째 아이를 맡기고 첫째 아이에게 나갈 수는 없었다. 하루 종일 굵은 빗방울이 내리는 날에 나는 둘째 아이도 데리고 가기로 했다. 남편에게 도저히 둘째 아이를 맡길 수 없었다. 첫째 아이에게 대하듯 버럭버럭 화를 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남편의 성질을 알기 때문에 힘은 들어도 아기띠를 메고 둘째 아이를 안고 집을 나섰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거리를 나는 조급히 달렸다. 첫째 아이와 이모가 있는 만화카페로 향했다. 사실 만화카페에 둘째 아이를 데리고 간 적은 처음이다. 이제 돌 무렵이 된 아이가 입장하는 것을 허락해줄지, 안 해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만화카페에 둘째 아이를 입성시켰다.

만화카페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둘째 아이도 들어가도 되냐고 물어보고 된다고 해서 함께 입장했다. 아기띠를 메고 있으면 그래도 조용히 잠을 자거나 깨있어도 울지를 않아서 다행이었다. 점심이 한참 지났을 무렵이라 배가 고팠다. 첫째 아이와 이모가 함께 있는 자리로 가서 엄마가 왔다는 것을 알리고, 점심때 떡볶이를 먹어 허기진 나는 라면과 가락국수를 시켰던 것 같다. 내 동생도 한 시간 후면 집으로 돌아가야 해서 조금 든든히 먹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아까 점심으로 먹은 게 아직 소화가 다 안되었나 보다. 첫째 아이와 동생은 조금씩만 먹었고 나는 애써 아기띠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가락국수 한 가닥 한가닥을 건져 먹었다. 이모가 갈 시간이 되어 배웅하고, 첫째 아이와 나는 비가 오는 거리를 커다란 우산 하나에 의지한 채 몸을 맞대고 발을 동동 굴리며 걸어왔다. 소나기처럼 푹푹 오는 비에 커다란 우산에 의지한 우리는 치마도 젖고 머리카락도 젖고 말았다. 10여 분 되는 거리를 한 시간이나 되는 것처럼 우산도 들고, 아기띠도 메고 첫째 아이의 손도 잡으며 그렇게 종종걸음을 치며 집으로 돌아왔다.


인상이 구겨졌던 남편님은 아주 태평하게도 자고 있었다. 얄밉고 밉고 원망스러웠다. 내가 그렇게 고생하며 왔다간 거리를 모른 채 쿨쿨 잠이나 퍼 자는 남편이 이뻐보일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비가 오는 거리를 딸아이 둘을 데리고 다녀왔다. 비는 왔고 빨래는 뽀송하게 말랐다. 아이는 이모와 만화카페에서 시간을 보냈고 그리고 비 오는 거리를 엄마와 동생과 함께 걸었다. 우산 속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추억거리가 생겼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또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작년 그런 일이 있었다. 딸아이 학교에 방문을 간 적이 있는데, 이유인즉슨 아이가 친구에게 돈을 뺏겨다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났다. 상황을 보니 아이는 친구가 돈을 달라고 해서 만원이라는 큰돈을 준 모양이다. 당시 나는 근처 개인병원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서 아이의 돈 관리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저금통에 적금하라고 천 원씩 모아 두고 할머니, 할아버지께 용돈을 받으면 모아두었던 돈을 간식을 사 먹기 위해 한 푼 두 푼 빼내간 것이었다. 나의 책임도 컸다. 엄마라는 이유는 돈을 주긴 했지만 아이에게 경제적인 상황과 돈 관리에 대해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게 큰돈을 가지고 갔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아이를 다그치고 반성문을 쓰게 하는 등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아이의 문제일까? 나의 문제일까.. 담임선생님의 중재로 돈을 가져갔던 친구와 친구의 부모님과 함께 대면하는 자리를 가졌다. 사건과 정황을 들어보고 담임선생님과 아이들 사이에 오고 간 이야기들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빌려갔던 돈은 갚았고 딸의 친구는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사과를 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마도 아마 저학년이라 돈의 개념이 바로 서지 않은 상태에서 간식을 먹고 싶고 큰돈이 보이니 달라고 한 것 같았다. 어떤 이유에서건 돈과 관련된 거래는 하면 안 되는 것이기에 아이에게도 부모님에게도 그렇게 말씀드렸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딸아이와 함께 위클래스 상담을 받게 되었다. 학교 안에서 갈등이나 고민이 있는 경우 아이들을 상담하고 필요시 부모님들을 상담하는 장치가 마련돼있었다. 나는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담임선생님을 통해 위클래스를 알게 되었고 바로 연락을 취하니 오라고 하셨다. 학교 건물의 4층에 마련된 위클래스 상담실은 아담하면서 차분한 분위기였다. 위클래스 상담사를 만나서 자총 지종의 이야기를 했다. 아이가 문제인 지, 아이 친구의 문제인 건지 답답했던 나는 앞뒤 맞지도 않는 말들을 쏟아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한 참이나 나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상담 선생님은 차분히 나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나의 상황을 직시하고 계셨던 것일까? 다음 주에도 한번 더 방문하라고 하시며 성격유형 테스트 같은 자료집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당시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남편과 일을 할 수 있음에도 자꾸 남편에게 의지하려는 나의 모습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선생님은 나에 대해, 그리고 우리 가족에 대해 객관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씀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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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10년 동안 많이 외로웠을 거라며 그동안 참고 있던 나의 시한폭탄을 톡 터뜨려주었다. 나는 그동안 참았다. 컴퓨터방에 살고 있는 남편을 참았으며 독박 육아의 외로움을 혼자 달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가운데 아이들이 있었고 나는 나대로 매우 지치고 피로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약간의 술기운이 필요하기에 매일 밤 맥주 한 캔으로 잠을 청하고 그렇게 나의 스트레스를 풀려고 노력했었다. 그것으로 풀리는 것이 아니기에 나의 외로움과 고군분투는 점점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남편이 매번 직장을 관두니 내가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있음에도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돈을 써 본 적이 없었다. 아이의 손싸개를 조금이라도 더 싼 것으로 바꾸려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아이의 옷이나 기저귀, 분유를 사기에도 매번 돈이 모자랐다. 풍족하게 아이들에게 과일 한 번 사준적이 없었다. 일을 해도 관둘 생각만 했고 남편이 더욱 잘 벌고 많은 돈을 가져다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건 내 욕심이었고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아이 아빠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회사 대표와의 갈등으로 회사를 관두기도 했었고 대학도 다니다 중간에 그만두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나설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남편도 자기 나름대로 많이 벌고 싶었고 어떻게든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이기에 노력은 했지만, 그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그 무렵 그 당시의 상황이 십 년 전과 너무 똑같았고 경제적으로 힘들었으며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어떻게든 삶의 돌파구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책 쓰기 과정을 우연히 알게 되어 책을 쓰면 인생이 달라지겠다 싶었다. 당시 나는 점점 늘어만가는 카드빚에 책 쓰기 과정에 드는 가까운 수강료를 여기저기서 마련해 결제하고 말았다. 그렇게 카드빚은 나날이 늘어만 갔고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책 하나 쓴 것에 대해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정작 마음은 더욱 잡을 길이 없이 외로워졌고 그 외로움은 아마도 나의 첫 딸, 하영이에게 많이, 그리고 오롯이 전달되었을 것이다. 엄마가 인상을 쓰고 웃지를 않는다. 저녁마다 맥주를 마시고 매일 피곤하다며 딸에게 호소했었다. 아이에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해소하고 싶었던 것이다. 무능력한 남편, 경제적인 큰 빚, 그리고 아이의 우울감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상담 선생님은 정확히 그리고 허를 찌르는 말을 해주었다.

이제는 당신이 가장이다. 더 이상 남편에게 기대서는 안된다는 말을 해주었다. 어떻게 서든 내가 가정을 이끌어가고 내가 아이들을 그리고 남편을 가족의 가정이라는 말을 하셨다. 나에게 말해보라고 했다.


나는 이제 이 집안의 가장이다.

나는 이제 가장이다.

나는 이제 가장이다.


크게 울부짖으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10년 동안 알면서도 모른 척 해왔던 사실.. 그랬다. 나는 모른 척하고 싶었던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지. 남편이 좋은 곳에 들어가겠지. 많이 벌면 나는 이제 일을 안 해도 되겠지. 집에서 아이들만 보며 살고 싶다.라는 생각들이 모두 허황된 꿈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결혼 10년 차 이제야 제대로 뭔가에 맞은 듯이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우리는 이혼 서류를 한 번 내본적이 있는 부부다. 첫째 아이를 육아하면서 참 많이도 외로웠고 힘들었다. 경제적으로 단단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를 독박으로 돌보는 것 까지.. 나는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피폐해졌다. 내가 일을 하면서도 남편이 잘되겠지, 남편이 잘 벌어야할텐데.. 그렇게 늘 믿고 있었다. 아니, 믿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결혼 10년차가 되니 알겠다. 나의 믿음은, 오롯이 나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걸. 연약하고 남에게 기대려고만 했던 나였다. 강인한 척 했지만, 나는 참 많이도 약했던 사람이었다. 나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부족했기에, 속 깊이 감추어져 있던 부끄러운 감정들이 가시처럼 나의 곁에 있는 사람을 찔러댄 것이 아닐까?


가정은 작은 일터라고 한다. 남편, 아내, 그리고 아이들.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 준비를 하고, 학교갈 준비를 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요이~땅! 신나게 하루를 출발하는 것이다. 그 선의 중심에 내가 있다. 가족들이 각자 자신의 페이스대로 잘 걸어갈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도록 나 역시 든든히 받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각자가 자신의 힘으로 우뚝 설 때 서로에게 기대는 것이 지원이 되고 힘이 될 수 있다. 남편이 힘들 때 나에게 기대고, 또 내가 힘들 때 남편에게 기댈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되어야지 생각한다. 부족한 부분은 늘 있는 것이고 채울 수 있고 가꿀 수 있는 것만 바라보아야지. 결혼 10년차의 우리는 출발 지점에서 이제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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