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내지도 무시하지도 마세요.
2014년 여름 큰딸이 하버드 대학교 기숙사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나는 작을 딸과 함께 큰딸을 만나러 생전 처음 보스턴을 방문했습니다. 출발 첫날은 차량 통행이 많은 지역을 지나느라 예상보다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장장 900킬로를 무사히 운전했습니다. 이틀 동안 하버드 대학교 인근에서 머물고 다시 400킬로를 운전해 뉴욕에 들러 지인을 만나 며칠 머물다가 소도시 몇 곳을 돌아 다시 토론토로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차의 주행 거리를 확인해보니 고작 5일 만에 3000킬로를 운전했더군요.
요즘은 워낙 다양한 길 안내 애플리케이션이 개발되었으니 스마트 폰에 의지한 체 초행길을 갈 수 있습니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종이 지도에만 의존하다가 낯선 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편리하기 이를 데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무선 인터넷 연결이 원할치 않거나 최신 지도가 적용되지 않은 지역에서 길을 잃게 된다면 난감한 상황이 되기는 마찬 가지입니다.
거의 10여 년 만에 미국 육로를 따라 여행하는 것이었지만 첨단 기술을 믿고 실시간 교통량에 따라 빠른 길을 안내하는 대형 회사의 내비게이션에 의존한 체 여행을 떠났습니다.
한국과 달리 어마어마한 평원을 지나 곧게 뻗은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경찰관입니다. 캐나다에서는 경찰관을 만나도 긴장하지 않는데 국경을 지나 미국 땅에 들어서면 가능하면 경찰을 만나지 않기를 바라게 됩니다. 미국 경찰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탓도 있고 실제로 옆을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긴장하게 되는 위압적인 풍모와 거친 응대 때문이기도 합니다. 경찰관이 옆구리에 차고 있는 시커면 권총도 눈에 거슬렸습니다. 미국을 오갈 때마다 단 한 번도 친절한 미국 경찰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뉴욕에서 경찰관에게 길을 물었다가 자칫 얻어맞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짜증 섞인 안내를 받고 난 후로는 경찰이 보이면 멀리 피해 다녔습니다. 교통법을 위반해서 벌금 티켓을 발부받거나 사고가 나는 등 나쁜 일이 아니면 경찰관을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아 되도록 만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행을 마치고 캐나다로 돌아오다가 길을 잃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뉴욕주를 관통하는 지방 고속도로를 벗어나 지름길인듯한 시골길을 달리는 중이었습니다. 드넓은 평야 지대였기 때문에 무선 인터넷이 원활하지 않은 지역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미리 지도 파일을 단말기에 저장해서 오프라인 상태인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랐습니다. 곧 캐나다 국경에 도착할 거라고 생각하니 긴 여정의 피로가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비게이션에서 안내하는 길이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터널 공사를 하느라 폐쇄됐다는 안내문만 덩그러니 있더군요. 공사 시작일이 제법 오래 전인 것으로 봐서 대기업 내비게이션도 수시로 정보 수정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습니다. 나는 다른 길을 찾지 못하고 같은 길만 되풀이해서 안내를 하는 내비게이션을 따라 인근 도로를 뱅글뱅글 돌아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했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도대체 어디쯤인지 동서남북 구분도 할 수 없는 곳에서 길을 잃은 것입니다. 단말기 속 지도를 확대해서 다른 길을 찾으려고 해 봤지만 불가능했습니다. 주변에 인가도 보이지 않았고 워낙 외지고 통행량이 적은 곳이라서 지나가는 차량도 없었습니다. 인터넷은 먹통이고 차에 연료도 넉넉지 않은 상태에서 마냥 낯선 곳을 헤매고 다닐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작은 딸은 차 뒷좌석에서 우리가 어떤 난관에 봉착했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태평하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딸을 위험에 처하게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911에 전화를 해서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없겠다는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처음 길을 잃었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장소가 그곳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공사를 하다가 중단된듯한 막다른 길 앞에서 차를 세우고 잠시 망설였습니다.
911에 전화를 한다고 해도 마땅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어느 공포영화 속 한 장면처럼 응급 전화 연결마저 안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했습니다. 하지만 쉽게 911 전화기 번호를 누르지도 못했습니다. 혹시나 나처럼 그 길의 통행이 불가능한 것을 미처 알지 못한 사람이 그 길을 따라 차를 운전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길을 한동안 노려보며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차 한 대가 나타나 폐쇄된 길의 안내문 앞에 서더군요.
나는 다급한 마음에 내 차에서 내려 그 차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상대편 차의 창문이 열리는데 건장한 남자 서넛이 차창 안으로 보였습니다. 겁이 덜컥 났습니다. 하지만 그 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차창 안의 남자 운전자에게 지금 나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다행히 남자는 제법 친절하게 웃으면서 자기가 앞서갈 테니 자기 차를 따라오라고 하더군요. 그도 이 길을 잘 모르지만 큰길까지는 안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인터넷이 연결되는 큰길에 가면 다시 내비게이션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거라는 생각에 흔쾌히 그의 차를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예상보다 오랫동안 큰길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길이 더 구불구불 해지고 끝도 없이 펼쳐진 밭 사이사이로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불빛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습니다. 곧 해가 저물고 어둠이 찾아온다는 신호였습니다. 문득 앞서 가는 차에 탄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와 내 딸을 어디로 안내하는지 전혀 모른 체 나는 그들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정신이 버쩍 들었습니다.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뒷자리에서 곤히 잠에 빠져있는 딸을 룸미러로 힐끔힐끔 보면서 이 난관을 빨리 벗어날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차를 세우고 911에 전화를 한다고 해도 내가 어디 있는지 설명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미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으니 다시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갈 도 없었습니다. 자동차 연료의 눈금도 자꾸 신경 쓰였습니다. 긴장한 탓인지 소변이 마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눈앞에 경찰이 나타나기를 바라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시골길에서 경찰관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기껏해야 스피드건을 들고 서 있는 고속도로 순찰대나 도심에서 주차 딱지를 떼러 다니는 지역 경찰이 있을 뿐 이런 시골 마을에서 갑자기 경찰이 눈앞에 나타날 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스릴러나 공포 영화 속 주인공이 된듯한 상황에서 나는 마치 구세주를 기다리듯 경찰이 나타나 주기를 바랐습니다. ’ 나타나라 경찰.. 아니 시골이니까 보완관이라고 해야 하나? 얼른 눈앞에 짠하고 나타나라..‘ 나는 긴장을 풀어볼 요량으로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경찰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왕복 1차선 도로에서 내 앞차 바로 앞에 경찰차가 달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경찰차에게 신호를 주느라 경적을 짧게 여러 번 울렸습니다. 경찰차가 내 신호를 알아채고 갓길에 차를 세웠습니다. 내 앞차는 그대로 주행해 가던 길을 갔고, 나는 경찰에게 내 상황을 설명했더니 인근 고속도로까지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드디어 인터넷이 연결되고 환하게 전조등을 켠 많은 차량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가던 경찰차는 잠시 고속도로를 내 앞에서 달리다가 출구로 빠져나갔습니다. 룸미러에 비친 작은 딸은 엄마의 마음고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잠에 빠져 있더군요. 나는 울컥 감정이 북받쳤습니다. 그만큼 내 긴장의 강도가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시계를 보니 내가 느꼈던 것보다 훨씬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고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내비게이션을 보니 내 예상보다 가까운 곳에 제법 큰 도시가 있었습니다. 초가을 키가 높이 자란 밭작물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뿐 고속도로도 내가 헤매던 길에서 멀지 않았습니다. 금방이라도 바닥을 보일 것 같았던 자동차 연료는 캐나다 국경을 넘어 집에 거의 도착할 때까지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했습니다. 다만 경찰차를 따라 고속도로에 도착할 때쯤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으니 만약 길에서 경찰을 만나는 행운이 없었다면 나는 어딘지도 모르는 길 한가운데서 판단력마저 흐트러져 큰 낭패를 당했을 겁니다.
내 아집과 안일함 때문에 작은 딸과 나의 안전을 미국 어느 시골길에 내팽개칠 뻔한 일을 겪은 후 먼길을 운전해야 할 일이 생기면 철저히 준비를 해서 길을 나섭니다. 목적지까지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도록 출발 시간을 정하고 만약 경로를 이탈하거나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돼도 당황하지 않게 지도책을 차에 비치했습니다. 좀 돌아가더라도 외진 길을 피해서 길안내를 하도록 내비게이션의 설정을 바꿨습니다.
길을 잃었을 때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찾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잘 모를 때는 그가 안내하는 길이 옳은 길인지 의심을 하게 됩니다. 이제 지나가는 낯선 사람보다 경찰이나 911에 도움을 청하는 게 훨씬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육도 예외는 아닙니다. 초행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옳은 길을 안내해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나는 미국 경찰만큼이나 만나기 싫거나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전문가가 있습니다.
첫째는 정신과 의사와 심리 상담가입니다. 감기에 걸리면 의사나 약사의 도움을 받고 자동차에 문제가 생기면 정비소를 찾고 가전제품이 고장 나면 서비스센터를 찾아가지만 아이들이 심리 상담을 하겠다고 할 때마다 그 정도는 누구나 겪는 문제라고 일축했습니다. 내가 정신과 의사도 아니면서 인터넷이나 책에서 주워들은 이론을 들먹였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나도 잘 알면서 그 정도는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큰딸이 어릴 때 잠깐 이상행동을 하는 바람에 정신과 의사를 찾았지만 돌아오는 진단이 너무 뻔했습니다. 나는 “그런 얘기는 나도 하겠다” 하며 실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후로 심리상담이나 정신과 의사를 신뢰하지 않았다는 게 나의 핑계입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때 정신과에 가지 않았다면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내 품을 떠난 후 정신과 의사나 심리 상담사를 가끔 만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힘든 공부를 하다 보니 스트레스 관리 차원으로 정신과를 찾았다고는 하지만 내심 걱정스러운 마음에 병증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주변 친구들과 같이 스포츠 센터에 다니듯 정신건강 관리를 하는 것뿐이라고 하더군요.
몸이 건강하고 체력이 좋아야 삶이 편안합니다. 정신건강이라고 다르지 않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신과 병원은 평생 가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곳 중 하나라서 멀리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딸이 하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엄마는 속사정을 드러내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걸 싫어하는 구닥다리야. 요즘은 정신과를 건강 검진받듯 가. 나에 대해서 몰랐던걸 알게 되니까. 엄마도 한번 가봐요. ” 라며 웃었습니다. 이유 없이 병원에 자주 들락거릴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가야 할 때 안 가는 게 더 바보 같은 짓인 것을 잊지 않으려고 수시로 되뇌며 살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내가 만나기 싫었던 사람은 입시전문가입니다. 이제 다 지나고 보니 그것 역시 미련한 생각이었습니다. 뭐든 지식보다는 감각에 의존했던 나는 미국 입시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와 시험 종류를 파악한 뒤 ’ 아이의 실력이 문제지 나머지는 별것 아니네 ‘ 하고 생각했습니다. 입시전문가는 전부 돈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라서 쓸데없는 학원 수강을 권하고 무리한 비교과를 제안할게 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입시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려면 비용이 비싼 것도 문제였기 때문에 세미나에 가서 귀동냥으로 분위기 파악을 하고 고3 때까지 단 한 번도 입시전문가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수시로 사설 입시 전문가를 만나 컨설팅을 받았던 어느 엄마가 나에게 부모도 입시전문가가 돼야 비로소 아이를 명문 대학교를 보낼 수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때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습니다. 미국 명문 대학교에 보낼 생각을 하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아이도 입시제도가 복잡하지 않은 캐나다 대학에 보낼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하버드 대학교에 원서를 쓰라는 진로지도 선생님의 말을 듣고 비로소 내가 너무 안일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이의 실력을 인정해준 선생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원래 계획했던 모든 것을 뒤집고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할 때 맞닥트리는 당혹감이 너무 컸습니다.
아이와 나는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성냥개비 몇 개를 들고 길을 나선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왕 실력을 인정받아 원서를 쓸 기회가 주어졌으니 제대로 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원서를 쓸 때 학생이 해야 하는 항목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일일이 선생님께 질문하며 완성해도 되지만 수많은 학생을 지도해야 하는 분께 너무 많은 것을 기댈 수는 없었습니다. 마지막 원서를 제출하기 전까지 실수를 줄이려면 조력자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입시 컨설턴트를 만나 원서를 어떻게 쓰면 좀 더 돋보일지 조언을 듣기로 했습니다. 고작 한 시간 동안 만나서 내 딸의 비교과 활동 내역과 성적 등을 보여주고 에세이에 대한 의견을 듣는 비용은 적지 않았습니다. 지난 3년간의 안일함을 전문가의 힘을 빌어 돈으로 메운 셈입니다.
역시 전문가는 명쾌했습니다. 내 딸의 장점과 단점을 꿰뚫어 보고 비교과 활동의 중요도부터 에세이 전략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더군요. 그날 그 상담을 받고 한 가지는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아이의 성적이 다른 하버드 지원자들에 비해서 뛰어난 것도 아니고 최선을 다했던 비교과 활동 또한 내세울 것이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컨설턴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합격을 할 거라는 기대보다 최선을 다해서 아쉬움을 남기지 말라더군요. 사실 그날 원서 쓸 때 필요한 요령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지나고 보니 쓸데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습니다. 다만 객관적인 내 딸의 위치를 파악한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내 딸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알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떨어져도 아쉬울 것이 없다는 마음이 들자 최선을 다하는 일만 남았더군요.
어느 지인이 입시 컨설턴트와 상담하는 것은 마치 점쟁이를 만나러 가는 것과 비슷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점쟁이가 알려주는 미래와 대처방법을 듣고 나면 삶에 변화 여부와 상관없이 마음이 편안 해진다더군요. 점쟁이도 입시 컨설턴트도 누구에게나 비슷한 말을 할 텐데 마치 나에게만 적용되는 것 같은 조언을 들으면서 든든한 지원군을 만난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라더군요. 입시에 성공하면 컨설턴트의 실력 덕분이고 불합격하면 학생의 실력이 부족한 탓이니 점쟁이와 다를 바가 없다면서요.
나와 내 딸은 그날 이후 객관적인 눈으로 내 딸의 위치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내 딸은 겸손한 마음으로 남은 과정에 최선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전문가란 사실 대단히 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결정적일 때 내가 있는 위치를 알려주거나 길을 안내하는 사람입니다. 어쭙잖게 아는 척하느라 전문가를 무시하다가는 엉뚱한 곳에서 낭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나처럼 극단 적인 상황에 가서야 부랴부랴 전문가를 찾는 바보 같은 짓을 하기보다는 미리 정보를 찾아보고 전문가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세요. 전문가를 너무 먼 곳에서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서점에 있는 책부터 시작해서 동영상 강의까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준비된 전문가들이 공짜로 들려주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래야 고작 길을 묻기 위해서 큰돈을 허비하거나 너무 신뢰를 한 나머지 운전대를 넘겨주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