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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찾기 May 30. 2023

인연

우리 계속 잘 지내봅시다

며칠 후 6월 2일은 남편과 내가 만난 지 만 34년이 되는 날이다.


20살의 6월 2일. 첫 대학축제의 마지막날이었고, 같은 과 여자애의 성화로 마지못해 간 4대 4 단체미팅 이었다.


나는 활달해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고지식한 구석이 많아서 고등학교 때까지 미팅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 때는 제과점 빵을 먹으려고(제과점에서 미팅을 주로 했다) 미팅을 나가는 아이들이 있을 때였고, 맛난 빵 먹으러 가자고 꼬시는 주변친구들도 있었으나, 나는 고고한 척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는 '대학에서의 미팅'에 대한 환상을 품고, 키우고 있었다. 순정만화책에서 봤던 스타일의 멋진 남자를 분명 만날 수 있으리라는.


그러나..

대학 가서 봄에 성사된 두 번의 미팅은 참혹했다. 근사한 남자애는 하나도 없었으며 매너까지도 별로였다. 너무너무 '애들'이었다. 내 머릿속에 그려온 '멋지고, 대화가 통하는 남자'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커피만 먹고 미팅을 파했고, 나는 다짐했다. 두 번 다시 미팅하나 봐라! 다시는! 다신! 안 한다!!


내가 미팅에 대한 환상을 너무 키웠던 거다. 고등학교 때 애들 따라 적당히 제과점미팅도 몇 번 하면서 미팅 별거 없음을 체험해봤어야 하는데, 환상 속에 산 거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몇 달 안 된 남학생들이 뭐가 그리 근사할 수 있고 멋있을 수 있었을까.


여하튼 그래서 내 대학인생에 두 번 다시 미팅 없음을 선언하였으나, 축제 마지막날까지 미팅인원 네 명을 확보 못한 동기여자애의 간곡한 요청을 차마 저버리지 못하고 끌려가서 만난 남학생이 지금의 남편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미팅에 대한 환상을 드디어 이룬 거 같고, 근사한 남학생이었나 보다 싶지만 꼭 그건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인연이어서 그런지 왠지 친근한 인상이고 편안하긴 했지만, 매력적이어서 끌리고 그런 건 아니었다.

반면에, 남편은 내가 입구에 들어올 때부터 '저 여자가 내 와이프가 될 거 같다!''운명적인 느낌'이 확 들었다고 했다.


그날 남편은 되지도 않는 "내 단무지 내놔(아직도 기억난다) " 같은 아저씨 유머를 열심히 날렸는데, 거슬리지는 않았으나 애들 같은 느낌은 똑같았다(20살의 남자는 대개 어린게 당연한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래도 축제 마지막 날이었고, 멤버들이 다 착해서 바로 파하지는 않았다. 학생회관에서 대학본부 앞 잔디밭으로 자리를 옮겨 막걸리 마시고 노래하며 놀았다. 참으로 당시 미팅은 건전하기도 했다. 계속 돌아가며 노래를 했다.. 막걸리가 들어가니 독창을 부르다 단체로 부르다 그랬었다.


그렇게 미팅으로 만난 남편과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사귀게 되었다. 최루탄이 난무하는 데모현장에서 우연히 만나 눈밑에 치약을 바르라고 빌려줬던 일들.. 여러 일들이 우연히(훗날 알게 되었지만, 때론 그의 의지가 포함된 우연을 포함하여) 일어났다.

사귀고 싶다고 고백하는 남편에게 딱지를 놓고 지내다, 몇 달 후 어느 날 밤 걸려온 남편의 울먹한 전화로 다시 인연이 이어지게 되었었다.


그렇다. 나는 남편과 인연이라고 느낀다.

둘이 사귀면서 학창 시절 얘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는 이미 고2 여름, 6박 7일 동안 전국고등학생 학교별 대표들을 모아놓고 교육한 새마을연수원(그런 시대였다. 전두환대통령 동생 전경환이 연수원장으로, 수료식날 악수도 했던 거 같다)에서 만난 같은 기수 동기였다.


미팅이 6월 2일이었고 며칠 후면 만 34년 되는 거다.

남편은 매년 6월 2일을 기념한다. 친정엄마는 결혼기념일을 기념하는 남자는 많아도, 만난 날을 매년 기념하는 남자는 드물다며 사위의 다정함과 한결같음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신다.


매년 거르지 않고 기념할 수 있다는 건, 별 탈없이 살고 있는 것이니 감사하다.

오래 사귀었, 오래 알아왔 함께 살고 있지만, 저절로 잘 지내지는 관계는 없다. 서로 노력해야 함을 늘 느낀다. 싸우더라도 건드리면 안 된다고 느끼는 부분은 건드리지 않도록 하고(상대방 집안에 대한 비난 같은), 선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쌓이다 보니 신뢰가 깊어지고, 서로의 집안에 대한 흉허물을 얘기해도 상대방의 순수한 진심을 알고, 대화가 평화롭게 이뤄지는 순간이 오게 되었다.


나를 방어하지 않고 맑게 다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서로의 진심을 투명하게 볼 수 있는 관계가 되려면, 시간과 인내가 꽤 필요한 일임을 느낀다. 20살부터 사귀었어도 오래 걸렸다. 


"상대방을 너무 쉽게 단정하고 지레 포기하지 않기"

"상대방만 바뀌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 먼저 바뀌려고 노력해 보기"

아직도 내가 노력하는 부분이고, 연애하고 결혼할 아들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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