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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서인간 Jan 21. 2021

가족을 못 알아보는 아버님께...

부모님의 보호자가 된다는 것 #5

벌써 4개월이 지났다. 


시아버지가 큰 사고를 당한 후 생명을 건지고 자발적으로 호흡을 할 수 있게 되고 폐렴과 욕창의 위기를 벗어났다. 아버님이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인 순간, 본인의 이름을 말하던 순간,  그리고 마비되었던 팔을 조금 들어 올리던 순간을 가족들은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이제 아버님은 휠체어에 탈 수 있고,  콧줄로 식사를 하고 태블릿 PC로 뉴스를 본다.  안색도 좋고 씹는 기능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치과의사인 내가 봐도 놀랍게 갸름해진 멋진 얼굴을 하고 계신다. 컨디션이 좋은 날은 웃기도 하시고, 큰 소리로 인사를 하실 때도 있다. 기적같이 행복한 순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순간이 길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실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아버님은 멍하고,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하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하신다.

 

전두엽 부위를 다치면 인지능력이 손상되고 성격이 변하며 멍한 상태로 의욕이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주치의가 일일이 일러주지 않아도, 검색만 해봐도 다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인데 가족의 입장에서는 답답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어제는 나한테 웃으며 인사를 했는데 왜 오늘은 모른 척 하시나. 어디가 나빠지고 있나. 내 정성이 부족한가.'


뇌를 다친 환자의 가족은 원망과 안쓰러움, 그리고 이유 없는 죄책감 같은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인 상태에서 하루하루 지쳐간다.  아픈 가족이 있는 사람들, 특히 뇌질환으로 인지능력이 떨어진 상태의 환자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가족이 힘든 이유는 환자와 교감을 하기가 힘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존경하는 은사님의 사모님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꽤 오랜 기간 고생을 하셨다. 사모님 때문에 힘들지 않냐는 제자들의 걱정에 '사랑하는 부인은 이미 죽었고, 지금 몸만 남은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라며 '지금은 부부의 의리로 그 몸을 돌보고 있다’고 은사님은 말씀하셨었다. 


물론 지금 내 시아버지는 다른 상황이다. 우리 아버님은 단순히 회복이 느린 것일 수도 있다. 어느 먼 훗날 온전한 정신으로 큰 며느리와 뜬금없이 정치 이야기하다가 서로 상처 받고, 어느 볕 좋은 여름날에는 각자 키운 토마토 사진을 교환하며 자랑할 날이 다시 올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4개월, 120일이 넘는 날들을 지내고 나는 나를 돌아본다. 그리고 다짐한다. 앞으로 일 년이 될지, 십 년이 될지 모르는 이 회복 혹은 정체의 시간 동안 인지능력이 떨어진 내 시아버지에게 익숙해져야 한다. 그게 내가 나를 덜  힘들게 하고 아픈 아버님을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응원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그 체념과 적응의 시간 끝에서 내가 좋아하던 원래의 시아버지를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새 시아버지에 익숙해져서 잘 지내보고 싶다.




※ 피렌체의 에어비앤비 숙소 밖으로 보이던 풍경을 그려보았습니다. 여행지 숙소에서 느긋하게 낮잠을 즐기던 때가 그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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