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 같은 80년대 한국 중고등학교에서는 드물게 온화하고 상냥한 녀석이었다. 무례한 일을 당해도 화를 내지 않고 무리한 부탁을 해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친구들끼리 밥을 먹으면 항상 먼저 계산하려고 했다. 키가 크고 날씬한 체격에 전형적인 모범생 안경잡이 스타일인 데다 말수도 적고 다른 사람 얘기를 잘 들어주어서 그 친구를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증권회사에 취직했는데 실적이 꽤 좋아서 회사에서 상도 받았다.
녀석이 어느 날 덜컥 경찰에 체포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투자를 잘못해 큰 손해를 봤는데 이를 만회하려고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었다. 유명인을 사칭해 결혼 축의금을 가로채려 했다고 했다. 황당했지만 '착한 녀석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하며 모두 측은하게 생각했다. '착한' 친구는 회사에서 해고된 후 개인 투자를 시작했다. 투자 실적이 매우 좋다며 강남에 사무실을 얻고 비싼 스포츠카를 몰고 다녔다.
그래도 여전히 착했다. 잘난 척을 하지도 않았다. 고시에 도전하다 취직 시기를 놓친 친구 두 명을 자기 사무실에 나오라고 해서 월급을 줬다. 가끔 월급쟁이가 가기 힘든 비싼 바에 데려가서 양주를 사주기도 했다. 그가 투자를 강하게 권유하지 않았는데도 많은 친구들이 그를 믿고 돈을 맡겼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도 정기예금을 찾아 1년 연봉 정도 되는 돈을 맡겼다. 그에게 돈을 맡긴 친구 대부분이 각서 한 장 받지 않고 통장에 돈을 보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그가 연락을 끊고 종적을 감췄다. 그에게 돈을 맡긴 친구, 선후배들이 모였다. 대충 따져봐도 그에게 맡긴 투자금이 50억 원 가까이 됐다. 집을 옮기는 사이 2주 정도 날짜가 뜨면서 받은 전세금을 몽땅 투자한 친구도 있었다.
이후 벌어진 일은 뻔했다. 금융위기로 하루아침에 투자금을 모두 날린 녀석은 마카오로 도망쳤다. 필리핀까지 가서 카지노를 전전하다 몇 달만에 귀국해 구속됐다. 그를 고발한 친구는 제일 많이 돈을 맡긴 친구도, 전세금을 다 날린 친구도 아니었다. 녀석 사무실에 취직해서 아무 하는 일 없이 따박따박 월급을 챙겨 받았던 녀석들이었다. 고발을 안 하면 자기들이 공범으로 몰릴까봐 그랬다고 했다. 몇 년 후에 녀석은 형을 마치고 사회로 나왔다.
지금도 잊을만하면 소식이 희미하게 들려온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 착한 친구를 만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