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를 바라는 이유

소확행

by 낙서인간

소확행,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2018년 올해의 유행어로 뽑히기도 했었죠. 이 말을 처음 접한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에서였습니다. 1996년도에 출간된 '하루키 일상의 여백'이란 책에 '나는 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는다'라는 챕터가 있습니다. 쇼핑에 대한 내용인데, 하루키가 미국에서 산 싸구려 물품들 - 목재 빨래 건조대, 고양이 손목시계, 고물 커피 테이블, 잭 퍼셀 운동화, 매트 데니스의 중고 LP - 등에 얽힌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구두쇠가 아니냐는 말을 들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다. 생활 속에서 개인적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크든 작든 철저한 자기 규제 같은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꾹 참고 격렬한 운동을 한 뒤에 마시는 차갑게 얼린 맥주 한 잔 같은 것이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하고 혼자 눈을 감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얼거리는 것 같은 즐거움, 그건 누가 뭐래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참된 맛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루키의 문체는 소박하면서 정제되어 있고 담백합니다. 내용을 떠나 문장을 읽는 것 자체가, 그가 좋아하는 재즈 음악을 듣는 것 같습니다. 난잡한 섹스나 잔혹한 범죄를 묘사해도 하루키가 하면 깔끔합니다. 하루키의 글을 처음 접하면 '나도 노력하면 이 정도는 쓸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의 작품을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그의 문체가 가진 담백한 매력에 푹 빠진 나머지 갖게 된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초절정 요리사가 만든 담백한 음식을 먹고 나서 '이 정도 음식이라면 나도 만들 수 있겠는걸'하는 생각이 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집에 와서 만들어보면 그 맛은 결코 재현되지 않습니다. 저에게 하루키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임에 틀림없습니다.


행복에 크기가 있다는 생각은 흥미롭습니다. 작은 행복이란, 일상에서 적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기쁨과 만족을 뜻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작은 행복을 얻기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은 생각보다 적지 않습니다. '운동'을 예로 들어볼까요. 저는 30대에 들어서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수영을 시작하고 나서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어렸을 때 수영장에서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경험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6개월쯤 지난 어느 날 마법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물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몸에 힘이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 날 이후 헤엄친다는 것이 고역에서 행복한 행위로 탈바꿈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한강을 헤엄쳐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행복을 주는 행위 가운데 가장 노력이 적게 드는 것 중 하나인 '쇼핑'은 어떨까요. 가격만 보고 무턱대고 물건을 사는 것은 순간적인 기쁨은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충족감을 주지는 못합니다. 하루키의 표현을 빌자면, 돈만 내면 뭐든지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재미없습니다. 행복을 주는 쇼핑에는 지식과 취향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사려는 제품의 특성과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누릴 수 있는 교양을 갖추어야 합니다. '물건 하나 사는 데 무슨 교양씩이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생필품이 아닌 기호품을 살 때에는 어느 정도 취향과 교양이 필요합니다. 정보를 찾고 경험해 보는 시간과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작은 행복이 있다면 큰 행복도 있을 겁니다. 무엇이 큰 행복인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인류를 전염병에서 구할 치료제를 개발한다든지 큰 기업을 일구어 사람들을 잘 살게 해 준다든지 훌륭한 정치인이 되어 세상을 바꾼다든지 하는 정도면 큰 행복에 해당할 겁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너는 꿈이 뭐야'라는 질문을 지겹게 들어왔습니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어른들이 기대하는 대답은 과학자, 의사, 대통령, 스티브 잡스, 타이거 우즈 같은 것들입니다. 나이가 들어보니 이제는 '꿈은 이루어진다'라고 사방에서 얘기합니다. 우리가 자라면서 들었던 '꿈', 어른이 되어 TV만 켜면 나오는 '꿈'은 모두 크고 불확실한 목표를 의미합니다.


재능이 넘치고 에너지가 초인적으로 넘쳐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작지만 확실한 행복과 크고 불확실한 행복 모두를 성취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큰 '꿈'을 버리면 작지만 확실한 행복 정도는 쉽게 얻을 수 있겠지 생각하지만, 막상 해보면 그것도 그냥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대부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행복이 하늘에서 똑 떨어지기를 기대하면서 살아갑니다.



✈ 그림 설명: 이탈리아 친퀘테레(Cinque Terre 5개의 땅)는 절벽으로 이어진 5개의 작은 마을입니다. 5개의 마을 중 마나롤라(Manarola)의 풍경을 종이에 과슈로 그려보았습니다. 5개 마을을 잇는 절벽의 트레킹 코스가 일품인데요. 다 걷는 데에는 하루가 꼬박 걸립니다. 뜨거운 여름날 트레킹 코스를 완주한 후 마셨던 차가운 생맥주의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그림 속에는 아주 조그만 지중해 바다가 숨어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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