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그늘 속에서

Seoul, KOREA

by Julia P

“모든 힘은 계속되는 것 안에 있다.”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어디에서 보았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는 이것이 나의 소년기少年期를 관통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적응이 어려웠던 한국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계속 노력했던 것, 영어를 놓지 않고 계속 공부했던 것, 과정의 중요함을 믿고 계속 치열하게 살았던 것, 마음이 꺾인 순간들도 계속 이겨 냈던 것. 그 모든 ‘계속되는 힘’으로 나의 소년기는 만들어졌다.


미움의 대상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아 다른 나라의 소식을 알 수 있는 방법이 한정적이었던 당시, 2년 만에 돌아온 한국은 낯설 만큼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유행하던 만화가 바뀌었고, 친구들 사이 자주 하는 놀이가 바뀌었으며, 인기 있는 가수도 바뀌었다. 어린 아이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많지 않았기에, 그 세계의 태반이 바뀌었다는 이야기이다. 한국에서 다시 시작한 생활이 미국에서의 생활과 다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가장 힘들었던 일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이 완전히 달랐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나는 나눗셈 기호를 처음 보던 날의 당황스러움이 선명히 기억난다. 그렇게 익숙한 곳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건만 나는 또다시 새로운 환경에 놓이는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리고 텃세나 배척의 태도는 한국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국에서 살다 온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미움을 많이 받았다. 수업 시간이든 평소든 영어를 쓰노라면 야유의 대상이 되었다. 눈치가 없는 편이던 나도 눈치챌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빨간색 펜으로 쓴 저주와 욕설이 가득한 편지를 받기도 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시키신 영어 문장을 읽고 있으면 어디서든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어를 쓰지 않기 시작한 것은 그때 즈음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자산인지 깨닫기 이전에, 그때의 나에게 나의 영어 실력은 남들로부터 감춰야 하는 것이었고, 나를 외톨이로 만드는 나쁜 대상이었다. 거부감이 부정적인 작용을 했던 것인지 영어 능력은 빠르게 퇴화했다. 그리고 그를 걱정스럽게 여긴 부모님에 의해 나는 한국 사교육의 현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경쟁의 시작


당시에야 싫었겠지만 지금 떠올리면 그때의 학원 생활은 나쁜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다.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내 능력을 인정받는 경험을 했다. 선생님들의 칭찬이 나를 기쁘게 했고, 그곳의 친구들은 그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일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기꺼운 마음은 아니었을 거라고 예상하고, 어린 마음으로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지금도 생각하지만, 피씨PC(주: Politically Correct)가 사회적인 화두가 되기도 전인 시절에 그 태도는 나를 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딱히 공부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취미 활동들을 많이 했는데, 악기 다루는 걸 좋아하여 피아노, 바이올린, 플루트, 첼로를 배웠다. 부모님은 내가 정서적으로 풍족한 사람으로 자라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고, 나는 그로 인해 다양한 취미를 가진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 예술을 좋아하게 된 감수성이나 새로운 걸 배우는 데 겁내지 않는 태도는 그런 경험들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진 것 같아 그 부분이 지금도 많이 감사하다.


공부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고, 중학교 때는 격렬한 사춘기를 겪었다. 반항심이 넘치는 나를 어떻게든 바른길로 인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부모님은 나를 특수목적고등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하셨고, 막상 준비를 시작하니 성취욕이 강했던 나는 이유야 어찌 되었든 열심히 준비하여 목표로 하는 학교에 가게 되었다.


꺾여버린 마음


합격 당시에야 뛸 듯이 기뻤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학교에 간 것이 반드시 좋은 선택이었는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교육 평준화의 옹호자도, 반대자도 아니지만 (일장일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비평준화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자기 잘났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한데 모여 꺾이는 경험을 해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 경험은 긍정적으로 발현되면 겸손이 되고, 부정적으로 발현되면 좌절이 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나는 후자에 속했다.


내 능력을 의심하게 되니 자존감이 떨어졌다. 당시에는 그게 건강하지 못한 마음상태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고, 그저 힘겨워 했다. 경쟁심이 강한 편이었음에도, 어쩌면 그랬기에 그곳의 치열한 경쟁에 숨이 턱턱 막혔다. 클 만큼 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어린 나이인 고등학생들은, 서로를 깎아내리는 데 망설임이 없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런 태도에 대한 문제의식 정도는 있었던 나는 그 집단에서 ‘치이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외국어 능력이나 학업능력이 뛰어난, 소위 난다긴다하는 아이들 사이에 있다 보니 그 사이에서 나는 영어를 잘하는 것 같지도 않고 공부를 잘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지금에야 그런 가치들과 무관하게 나라는 존재 자체로 사랑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그게 나의 가치였다. 내가 너무나 무가치하고 쓸모없게 느껴졌다. 그것에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부분은 차치하고, 나는 ‘공부를 잘해야 가치 있는 사람이다.’라는 그릇된 명제로 나의 중심을 구성하고 그 압박감에 장렬히 패배했다.


스트레스성 위염을 달고 살았다. 걷다가 아파서 주저앉을 정도로 심했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공부하다가 학교 뒤뜰에 나가서 울 만큼 너무나도 괴로운 나날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고등학생이라는 신분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섣부른 판단을 내렸고, 수시전형에 지원하여 붙는 바람에 목표로 하던 대학에는 끝까지 도전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다. 대학에는 합격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다.


좁아진 세계


입시를 치를 당시에는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하고 내린 선택이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대학교 꼬리표가 인생의 꼬리표처럼 느껴졌다. 큰딸에게 기대를 걸고 지원과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부모님을 실망하게 한 것 같았다. 동생에게 모범이 되는 언니이고 싶었는데 순식간에 자격 미달이 된 기분이었다. 내 인생은 실패작이라고 생각했고, 내게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이 새겨진 듯 굴었다. 그것이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상처입히는지도 모르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안쓰럽게 하는지도 모르고, 한없이 오만하고 철없게 행동했다.


당연하게도 학교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했다. 나는 공부만 하는, 그리고 학점만 아는 학생이었다. 성적표에 찍히는 알파벳Alphabet이 나의 가치를 증명한다고 믿었다. 마음 둘 가장 친한 친구들 – 학교와 무관한 – 을 제외하면 만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세상이 좁아졌다. 시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주 작은 세계에서 성공과 실패의 영역을 나누고 실패라는 곳에 나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이 실패를 보전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꿈의 서막序幕


Rita: Sam, I worry. I worry sometimes. 샘, 나도 걱정해요. 나도 때때로, 걱정을 해요.

Sam: Yeah... do you worry that you did something wrong? 네…. 무언가 잘못했을까봐 걱정하나요?

Rita: No. I worry that I've gotten more out of this relationship than you. 아뇨. 내가 당신보다 이 관계에서 더 많은 걸 얻은 것 같아서요.


계기는 어린 아이에게 흔히 찾아올 수 있는 일에서 비롯되었다. 어린시절 나는 친하게 지내는 사촌언니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 사촌언니 그리고 작은이모와 함께 영화관에 영화를 한 편 보러 갔었다. 그리고 그 날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지금도 잊히지 않고 생생한 그 장면이 나의 오랜 목표이자 꿈의 시작이 되었다.


「아이엠샘I am Sam」은 7살 수준의 정신 연령을 가진 지적장애인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그 영화에서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미셸 파이퍼Michelle Pfeiffer가 연기한 변호사 리타Rita 역役이었다. 나는 지적장애를 가진 아버지가 양육권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변호사의 역할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어린 눈에 법정에서 변론하는 모습이 퍽 멋져 보였고, 클라이언트Client와 ‘한 팀Team’이 되어 ‘정당한 (혹은 그래 보이는) 일’을 위해 싸우는 모습이 마음을 움직였다. 집에 와서 나의 새로운 꿈에 대해 얘기했다. 부모님은 나의 꿈을 늘 인정해 주셨지만, 이때 나는 본능적으로 부모님이 나의 꿈을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지지해 주신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 이후로는 뻔한 이야기이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사회생활을 하기에는 자격증을 보유하는 것이 편리하고, 공부를 잘하면 변호사나 의사가 되는 것이 흔한 일이고, 집안의 장녀로 동생들에게 모범이 되는 사회적 성공을 거둘 것. 그런 유인들에 의해 나는 이날 시작된 꿈을 아주 오랜 시간동안 정성스레 키워냈다. 크면서 변호사의 역할이 어릴 때 가졌던 환상과는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그 꿈은 나의 일부였고, 더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꿈을 향한 한 발을


그래서 시작한 것이 사법 시험이었다. 나는 로스쿨 제도가 도입된 해에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리하여 사법 시험 제도가 아직 존속하고 있을 때 학교를 다녔다. 성공에 대한 조급증이 생기고, 초조해졌다. 대학 입시의 실패는 더한 성공을 거두면 이겨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실패라고 규정지은 것을 다른 성공으로 보전할 수는 없다는 것, 그것이 인생에 사실 그렇게까지 유의미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삶이 불행하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몰랐다. 힘든 마음은 치열한 삶의 방증이라는 왜곡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부에 제대로 마음을 두고 집중하지 못했다. 불안해하는 데 힘을 다 쏟은 탓인지, 나는 대체로 긴장되어 있고 또 지쳐 있었다. 몇 번의 휴학을 하면서 시험을 준비했지만 좋은 결과는 없었다. 지금에 와서 후회라고 한다면, 그때의 나에게 좋은 결과가 있을 리 없었다는 것을 지금의 내가 인정할 정도로 불성실한 수험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변호사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의 오랜 꿈이자 목표였기에 이루고 싶었다. 사법 시험의 합격 인원을 줄이는 상황에 불안했던 나는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는 방향으로 진로를 전향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하여 나는 휴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갔다.


누리지 못한 대학 생활이 그제야 아쉬워지기 시작했다. 학교 행사에도, 동기들과 어울림에도 관심이 없던 나는 그래도 대학 다니면서 외국은 한 번 나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미국에서의 기억이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에, 한 번 더 외국에서 생활하는 경험을 해 보고싶었던 것도 있었다. 그리하여 학교에서 제공해 주는 인턴십 프로그램에 지원했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인생 첫 캐나다Canada행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사랑이 없던


나의 소년기는 그저 힘겨웠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소소한 기쁨과 즐거움들이야 있었겠지만, 인생에 갈등이 많은 시기였다. 부모님과도, 주변 사람들과도, 또 나 자신과도. 흔히들 떠올리면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라고 하는데 나한테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산다 해도 그 인생을 선택하는 이유는 견디는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열정적인 삶을 경험했고, ‘최선을 다한다’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계속되는 것의 힘을 체감했다. 또 평생의 친구들, ‘내 사람들’을 얻었다.


어쩌면 나의 이 고난은 배부른 한탄일 수 있다.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는 환경이었고, 대학에 다녔고, 매 학기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는 경험도 했으며, 마음 아플 때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인생에는 그런 시기가 있는 것 같다. 내가 가진 것들을 도외시하게 되는 순간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갈구하고, 스스로를 불행의 사고로 밀어 넣는 시간이. 마음이 가난한 때가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나고 나면 한없이 찬란한


시간이 흐르며 얄팍하게나마 내가 내린 답은 그것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잃어보기 전엔 소중함을 모른다.’든가, ‘어떤 순간의 가치는 그것이 추억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와 같이, 지나간 시절과 언젠가 내 손에 있던 유한한 무언가의 찬란함을 찬미하는 격언은 너무도 많다. 자신이 느끼는 가난이 종래에는 가난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때, 사실은 제 손안에 반짝이는 보석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현재를 살게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보석이 나의 어딘가에 분명 숨겨져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역시 다행스럽게도, 마음이 가난하던 그 시기에 끝이 왔다. 그늘이 계속 그늘이기만 하지는 않았다. 사실은 눈부신 시절이라는 것을 그 끝자락에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것이 나의 소년기였다. 그러나 그 막바지에 나는 위태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후유증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 인생에 가장 사랑이 없던 시기였다.





두 번째 편지.



더 이상 가깝지 않은 나의 친척들에게.


어린 시절 함께했던 기억은 어느 순간 끊겨 있고, 이제는 어떻게 사는지 알기 어려운 사이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때의 시간이 저로 하여금 꿈을 갖게 하고, 또 저를 자라게 했어요.


추억이란 게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미화되는 부분이 많잖아요? 함께했던 기억 중 나빴던 기억은 없어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고 다시 느낄 수 없는 감정이라 그리운 감정이 들기도 해요.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어떤 일로 울고 웃으며 지내는지 더 이상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나는 여러분의 행복을 바라요. 어딘가에서, 또 어린 시절의 우리가 그랬듯 나중에 떠올리며 웃을 수 있는 추억들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기를.


여전한 가족으로부터.